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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곰신’과 국가 안보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정희진(대학 강사) 2006-04-21

얼마 전 연애가 시민권, 국가 안보와 연결된 사안임을 시사하는 ‘중대한’ 사건이 보도됐다. 육군 제20사단 예하 백마부대는 ‘사회’(군대는 사회가 아닌가?)에 애인을 두고 온 장병들이 전역 때까지 ‘곰신’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여, 군 복무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애인 상담제’를 운영하고 있다. 인품있는 병사의 상담병 지정, 심야에 애인과 통화가 가능한 ‘사랑의 전화’ 설치, 애인 생일에 외박 허용, ‘애인 관리 기법 향상 세미나’ 개최 등이 장병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 다소 변화가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으로 여성보다 남성이 성적(性的)으로 더 적극적이며 기회도 많고 조건도 자유롭다. 그러나 남성이 성 활동을 훨씬 많이 하는데도 그들은 사회적 존재지, 성적인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남성은 ‘문란한 남성’과 ‘정숙한 남성’으로 구분되지 않는다). 이성애 제도에서 파트너 교체도 남성이 더 잦은데, “남자가 고무신 바꿔 신었다”는 말은 없다. 인터넷 ‘곰신’ 관련 사이트에서 ‘군화’는 남자 군인, ‘곰신(고무신)’은 그의 애인을 의미한다. 왜 하필 신발일까? 군화는 끈이 있고 발목까지 착용하기 때문에 신고 벗기 힘든 반면, 고무신은 앞뒤가 명확하지 않아 방향만 바꾸면 쉽게 뒤집어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외인부대에서도 군인과 사귀는 여성을 ‘암뻐꾸기’(cuckold)라고 부르는데, 이는 암뻐꾸기가 수뻐꾸기를 자주 바꾸는 데서 유래했다. 모두 여성 섹슈얼리티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와 ‘문란’에 대한 비난을 함의하고 있다. 2차대전 시기 일본군의 후방 사수 전략에는 군인 아내의 ‘정조 관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처럼 여성의 성과 사랑은 국가의 관리 대상이 된다. 남성의 섹스와 연애는 에이즈 같은 질병 상황을 제외하면, 국가가 관리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권을 획득하는 방법은 성별에 따라 차별적이다.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방의 의무를 진다”는 헌법 조항은, 국민이 되는 방법이 병역 의무 이행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남성은 국가와 직접 연결되거나 국가 자체가 남성이지만, 여성은 남성을 통해 국가에 닿을 수 있다. 때문에 ‘남자가 없는 여자들’- 레즈비언, 비혼(非婚) 여성, 이혼 여성 등- 혹은 남성에게 선택되기 어렵다고 간주되는 ‘못생긴’ 여성은 한국사회에서 시민권을 갖기 어렵다. 여성이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방법은 남성에게 밥을 해주거나 섹스, 연애 상대가 됨으로써 즉, 성 역할 노동을 통해서이다. 북한에서도(특히 식량난 이전), 젊은 여성이 ‘영예 군인’(‘상이군인’)이나 북송 장기수와 결혼하도록 적극 장려했는데, 이는 남성을 통한 여성의 국방, 애국 행위의 극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체제를 초월하여 국가에 ‘헌신’한 남성에게 ‘젊고 예쁜’ 여성과의 결혼은, 남성의 ‘희생’에 대한 확실한 보상으로 간주된다.

연장선상에서, 한국사회에서 젊은 남성이 군대에 가면, 또래 여성은 애인으로서 성 역할을 강하게 요구받는다. 이는 개인 차원의 연애를 넘어 탈영 같은 일탈을 방지하는 일종의 국방 행위, 국가 안보 실천으로 인식된다. 남성이 조국과 여성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장병의 안녕을 지켜주는 것이며, 여성이 남성에게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여성의 감정 노동, 보살핌 노동에 의지하고 있다. ‘고무신 갈아 신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비난과 ‘상처’는 이같은 인식과 관련이 있다. 애인이 군 복무 중인 여성과 사귀는 남성도, 남성 연대를 깨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된다.

군대 내 ‘곰신 관리 제도’가 사병 ‘인권’ 차원에서 옹호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만일 그렇다면, 나는 이 제도가 ‘국가는 개인의 사생활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통념이 얼마나 성차별적 담론인지를 보여주는 사례로서 정치적 공론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사실, 국가는 남성의 이해관계에 따라 사적 영역에 선택적으로 개입한다. “비바람은 집에 들어가도 법은 집안에 못 들어간다”는 말처럼, ‘프라이버시 권리’는 오랜 세월 국가가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방관하는 논리로 정당화되어왔다. “가정폭력은 사소한 집안일”이라는 인식은 우리 사회의 프라이버시는 곧 남성의 프라이버시라는 걸 의미한다. 만일 국가가 사적 영역에 개입하지 않아야 한다면, 70년대 출산 통제 정책이었던 가족계획이나 그 반대인 현재의 저출산 대책, 상속세 등도 모순이며, 더군다나 ‘국민’의 연애를 관리, 간섭하는 ‘곰신 관리 제도’는 어불성설이다(이 글은 권오분, 정추영, Rosemary McKechnie의 글에서 도움 받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