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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의 모든 것 [5]
사진 오계옥이영진 오정연 2006-04-27

이효인 영상자료원 원장 인터뷰

“이제는 연구단계를 벗어나 대중화해야 한다”

지난 2003년 부임한 이효인 원장은 오는 7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내년 3월 예술의전당에서 상암DMC로 이전할 예정이다. 공교롭게도 여러모로 미묘한 시점에서 진행된 인터뷰가 아닐 수 없다. 재임 기간 동안 그가 젊은 연구인력과 새로운 마인드를 도입하여 벌였던 다양한 사업 중 일부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고, 일부는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소득을 보지 못했다. 뿌듯함보다는 아쉬움이 더욱 많은 시기. 자료원장으로서 그리고 한국 영화사 연구자로서 이효인 원장은 한국영상자료원과 한국 영화사에 대해 아직도 할 말이 많고, 해야 할 일이 많다고 말한다.

-부임 초기, 한국영상자료원을 국립아카이브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밝힌 바 있다. =중간에 목표가 달라졌다. (웃음) 처음에는 주어진 예산과 인력 안에서 열심히 하면 국립영상아카이브라는 완결된 구조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고를 받아쓰는 정부산하기관이기에 활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고, 지원을 받더라도 언제나 행정절차를 따져야 하더라. 사업의 완결성보다는 일하는 체제나 일하는 사람들의 마인드 혁신이 더 큰 과제로 다가왔다.

-구체적으로 가장 주력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너무 흔한 말이어서 좀 그렇지만, 결국은 경영혁신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자료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과 외부에서 보고 싶은 자료를 열람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필름의 경우, 이를 관리하는 장비를 갖추거나 이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자료관리를 위한 실무 매뉴얼을 갖추는 것이 과제였다. 그리고 이걸 열람하는 것은 자료실과 고객 서비스 차원의 문제다. 고객 서비스팀은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하고, 자료 담당자는 보유 자료 중 어느 정도를 자료실에서 열람할 수 있게 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재임기간 중 조직개편도 몇 차례 있었고, 몇달 전에는 꽤 대대적인 인사이동이 있었다. =아마 임기 중 마지막 인사이동이었을 거다. 특징적인 것이 있다면 자원관리팀과 연구팀이 소규모로 인력을 교체한 것이다. 사실 보존과 활용이라는 개념 자체가 아카이브 내에서 계속적으로 갈등이 존재하는 두축이다. 한쪽은 온전하게 지키려 하고, 다른 쪽은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하는데, 필름이라는 것이 노출이 많으면 훼손될 수밖에 없지 않나. 자원관리팀 내에 수집된 자료를 평가하고 의의를 확인할 수 있는 안목을 지닌 연구자가 있어야 한다는 필요성도 있었다.

-디지털 아카이빙의 필요성에 대해서 지속적으로 발언해왔다. =2003년부터 이를 위한 예산을 구하려고 뛰어다녔는데 잘 안 됐다. 박물관학이 발달한 서구의 필름아카이브에는 노하우가 있고, 그걸로 잘해왔기 때문에 디지털 매체는 불안하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필름복원 전문인력은 하나도 없고, 복원을 위한 기초장비, 이를테면 수축된 필름을 다시 현상할 만한 수축필름 인화기나 작은 현상탱크 등도 없다. 1970년대 이전 컬러영화 중 이른 시일 안에 손을 봐야 할 영화가 800편 정도다. 이 영화들은 모두 듀프 네거를 만들어 색보정을 하고, 이를 보존용과 활용용 프린트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디지타이징을 하면 복구와 복원, 활용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영화별로 몇개의 키워드, 이를테면 그중 장소를 입력할 수 있는데 서울역이니 충무로 등으로 검색하면, 한국영화에서 서울역이 나오는 장면을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게 된다. 혁신적인 서비스가 가능해진다.

-현재 이 사업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어떤 식으로 진행해야 하고, 얼마만큼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은 분석이 끝났다. 디지털 아카이빙을 완결짓기 위해서는 5년 동안 130억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일단 올해는 20편의 영화를 샘플로 선정해서 디지털 아카이빙을 진행할 계획이다. DJ 정부 때 조성된 영화진흥금고 예산이 2500억원 정도였다. 근데 그게 영화진흥위원회 기금이 됐다. 영상자료원이 자기 밥그릇을 못 챙긴 거다. 그 돈만 있었으면 지금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었는데. 스크린쿼터 얘기하면서 문화다양성 논의가 있었다. 내 생각에 영화계에서 다양성의 중요한 변수는 아카이브 문화인데, 다들 이걸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 답답하다.

-한국영화 100선, 근대문화재 등록 등의 사업이 올해 안에 완결된다고 들었다. =1936년부터 1995년까지, 자료원에서 필름을 소장하고 있는 한국영화 중 100편을 선정하는 것이 한국영화 100선 작업이다. 영화사적 의미, 사회사적 의미, 시대적인 파격 등의 기준에 따라 외부전문가들이 선정을 마쳤다. 앞으로 이 작품들은 우선적으로 복원되고, 영문프린트를 제작하거나 홈페이지에 이들 영화에 대한 영문 설명을 개재해서, 활용도를 높이려고 한다. 그리고 2005년 7월부터 문화재 대상에 부동산뿐 아니라 동산이 포함된다는 규정이 생겼다. 현재 문화재 위원과 전문위원이 기준과 선정방식을 이야기 중이다. 1955년 이전에 만들어진 영화가 대상이 된다.

-100선에 포함된 영화 외에도 시급하게 복원해야 하는 영화가 있다면. =한두편이 아니다. 테크니스코프영화들이나 초기 컬러영화들이 급하다. 정말 중요하고 희귀한 영화들이야 우선적으로 복원기회를 갖는데, 적절한 프로그래밍의 대상이 되지 못한 영화들이 문제다. 잘났든 못났든 모두 우리 영화 아닌가.

-개인 소장가가 보유한 자료 중 아직도 기증받지 못한 자료가 많을 것이다. =지난해 자료에 대한 보상 금액 및 기준, 절차 내규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예산문제로 자료를 돈을 주고 산다는 게 금기시되어왔다. 수집가들이 소장품을 중요시하는 건 당연하지만, 장담하건대 본인이 가지고 있으면 그 자료는 50년 안에 사라진다. 자료원에 맡기면 본인이 원할 때 언제든지 쓸 수 있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특정 형태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다. 나 역시 두달 전, 내가 가진 거의 모든 자료를 기증했다.

-지난해와 지지난해, 중국전영자료관에서 <군용열차> <미몽> 등 1930년대 한국영화를 들여오는 등 해외 수집성과가 많았다. 해외 아카이브와의 교류가 활발해진 듯하다. =2004년과 2005년에 걸쳐 동북아시아영화제를 개최했고, 각국 아카이브를 계속 방문했다. 우리의 지향점이 그들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 한국의 아카이브가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줬다. 동양만의 아카이빙 기술이나 아시아적인 영화 정체성 확립은 앞으로 남은 과제다.

-당신은 한국 영화사 연구 1세대라고 할 수 있다. 영화이론이 아닌 한국 영화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 =영화운동을 하다 라틴아메리카의 영화운동 등을 접하게 됐다. 우리에게도 해방 전에 카프(KAPF)영화운동이 있지 않았나. 문학이나 미술에서는 그에 대한 연구가 어느 정도 이루어졌는데, 영화쪽에서는 내가 처음으로 카프를 다뤘다. 당시에는 모두 누벨바그와 고다르만 공부했고, 한국 영화사를 다루는 사람은 없었다.

-카프와 해방 전후 한국영화에서 이후 영화로, 관심이 어떻게 이어졌나. =1980년대 내 또래 사람들 중에는 과장된 제스처로 한국영화에 대한 애정을 말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장호나 배창호에 대한 애정과 관심일 뿐이었다. 그런 풍토에 대한 이론적인 반작용 때문에 이후 한국영화를 공부했다. 전부 반공영화 일색이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한국영화만의 미학을 도출해야 한다는 이상한 사명감이 있었다.

-얼마 전 <씨네21>이 영화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충격적인 것은 이들이 한국영화, 특히 60, 70년대 감독들을 인지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학 영화과와 자료원이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있지 않을까. =지난해에 서울 소재 영화과 강사들에게 다음 학기 수업에 사용할 영화를 알려주면 준비를 해놓겠다고 했는데 이용을 안 하더라. 한국 영화사 연구자가 많아졌다고 하지만, 이제는 연구단계를 벗어나 대중화를 해야 한다. 이를테면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한국 미술사 강의를 통해 주부까지 한국 미술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지 않았나.

-영상원의 다양한 시설 및 프로그램도 부임 이후 많이 바뀌었다. 어떻게 평가하나. =처음에 자료실엔, 슬리퍼에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당시 300원만 내고 들어와 하루종일 있으면서 집 앞 비디오 가게에도 있는 영화를 보는 사람들 태반이었다. 하지만 영상자료원이 그걸 위해서 존재하는 건 아니잖나. 영화사적으로 가치있는 외화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비디오 보관고에 넣고, 한국영화는 거의 대부분 자료실에 비치했다. 처음에는 불만도 많았다. 왜 비디오를 바꿨냐고. (웃음) 고전영화관은 지난해까지 상영횟수만 늘었지 이용객 수는 오히려 줄었는데, 올해 들어 실무자들의 홍보 노력 때문인지 제법 많이 알려진 것 같다. ‘고전영화관 맞춤 서비스’는 지난해 9월에 시작해서 연말까지 10회 이상 유치했다. 동창회를 겸하는 경우도 있고, 반응이 좋은 편이다. ‘영화의 고향을 찾아서’는 정말이지 감당이 안 되는 낭비 사업이어서 없앴지만, ‘찾아가는 영화관’은 하면 할수록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사업이다.

-연임에 대해서는 고려한 적 있나. =고려해봤지. 안 하는 걸로. (웃음) 굳이 사업의 맥을 끊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스타일로 바꿔볼 필요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곳에서 영화사 전문가로서의 역량을 한번도 발휘하지 못하고 나간다는 것이 아쉽다. 연구자 개인으로서 추진하고 싶은 사업이 있어도 전체 예산구조나 조직을 생각해서 스스로 거세했던 것도 있다. 이전에는 실제적인 행정에서 밀리면 안 된다는 강박관념으로 일관했던 것 같다. 뭔가를 달성하기 위해서 거짓말도 곧잘 하고, 눈에 거슬리는 것도 못 본 척하는 식으로 변한 걸 느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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