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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십 평생 촬영소 지으며 길 닦는게 일이었지”
2001-08-22

이영일이 만난 한국영화의 선각자들- 이필우(5)

경성촬영소에서 안양촬영소까지, 초기 한국영화 제작 환경을 마련하다

영화계를 떠난다는 마음으로 금촌에 들어앉았는데, 일본감독하고 배우가 와서 소개할 사람이 있다며 한사코 서울로 끌어내 왔다. 올라와보니 일활(日活)에 있던 뚱뚱보 희극배우가 나와 있었다. 남산에서 술 한잔씩 하며 모여 앉았는데 그 얘기가, 기계는 자기 집에 얼마든지 있고 자본도 끌어올 테니 영화사를 하나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으로 모여서 왕래가 있던 중에 이 배우가 빚을 지고 동경으로 쫓겨 들어갔다. 남은 놈들끼리 조선문화영화협회를 만들기로 하고, 기계를 인수하러 나를 동경에 들여보냈다. 가서 보니 말이 전부 달랐다. 배우는 어디 가고 없고, 기계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그 부인을 찾아갔는데, 남편은 감옥에 가고 없고, 기계는 전부 저당잡혀 있으니 돈 삼천원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어서 돈을 해다 주고 바르보 하나를 챙겼다. 그러고도 한 넉달을 고생해서 프린타 두채, 녹음기 전부를 실어 내왔다.

문화영화협회를 창설(1940년)하고부터는 <경일뉴스>라고 해서 처음 우리 손으로 뉴스를 백이기 시작했다. 청량리 산업박람회 때, 우리 기사들이 전부 나가서 조선총독을 촬영해온 것이 처음 일이고, 그때부터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를 제작해 전부 경일문화영화관에 갖다 붙였다(<경일뉴스>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사가 조선문화영화협회와 계약을 맺고 제작한 뉴스 영화다. 1930년대 후반부터는 우리 영화계에 일본영화사와의 합작이 성행하는 한편, 군국주의적인 어용영화를 강제로 제작하게 되었다.- 필자). 이때 홍개명(<아리랑고개>(1936) 등의 감독- 필자)이가 일본에서 돌아온 뒤라 갈 곳 없이 있는 것을 들어와 있게 했는데, 이 사람이 일년이 못 가서 “구따이(舊代)하고 신따이(新代)가 교체돼야 한다”고 공작을 했다. 일본놈들이 거기에 넘어가서 나를 있지 못하게 했다. “이놈이 일본서 배웠으니 뭐가 나아도 날 게지. 이필우 나가라!”

그렇게 만주로 들어가서 해방될 때까지 있었다. 그곳에서는 <만주통신>의 전선사진부에 있었다. 사진을 백여서 벽에 붙이는 ‘벽신문’ 제작 일을 맡아보고 있었는데, 한번은 <만주통신>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일본에서 들여온 기계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출신이 한국사람이고, 벽보나 하고 있는 사람이 본다고 알겠느냐”고 내빼보는데, 어디서 알고 왔는지 내 이력을 아는 체하며 저녁으로 후대를 해주었다. 일주일 후면 만주건국기념식이 있는 날이고, 황제가 즉위하는 그 장면을 매일 동경으로 발신해야 하는 형편이었다(일본이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세운 1932년부터 1945년까지 만주영화계 또한 일본 국책영화를 강제로 제작했다.- 필자). 급한 대로 손을 봐주고 나니, 이번에는 즉위식 끝날 때까지 있어주면 어떻겠느냐고 붙잡았다. 저녁 한시부터 두시 사이에만 봐주고 하루에 이백원을 받기로 했다(이무렵 조선문화영화협회에 남아 있던 기사들의 월 급여가 170원이었다.- 필자). 그렇게 매일 이백원씩 받아서 돈을 모았다.

해방 후 미국영화를 배급하다

해방이 되고는 봉천으로 나와서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하루는 일본에서 배급소 하는 사람이 나와서 초대를 하니 명월관으로 모두 모이라고 소식이 왔다. 다들 필름을 좀 얻어 보려고 애들을 쓰고 그러는데(배급용 영화를 유치해보려 했다는 뜻- 필자), 거기서 단성사 시절에 <아라시노 고지>(あらしの 孤兒·그리피스의 1921년 작품, <풍운의 고아들>(Orphans of The Storm). 우리나라에는 1923년 무렵 수입·개봉되었다.- 필자)를 배급해주었던 유나이지트(유나이티드- 필자) 지배인을 만났다. ‘중앙배급소, 센트라르 무빙픽’을 만들고 있는데, “본사는 동경에 있고 여기는 지사가 될 테니 이필우 당신이 기초를 좀 잡아달라”고 해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 실은 이게 그때까지만 해도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미국 공보원에서 하는 사업이었다.

그때부터 배급에 대해서는 일절 내가 맡아서 극장마다 서양영화를 배급했다. 공보원에서 배급사업을 하다보니, 일을 좀 확대시켜보고 싶은 생각이 나서 일본에 들어갈 길을 찾았다. “우리야 해방이지만, 전쟁 후니 일본놈들 아마 다이나마이트로 맞은 고기 같은 꼴일 게다.” 무슨 조건을 붙여도 거래가 쉬운 사정일 것이라는 점을 노리고 들어가서 자동현상기 한대하고, 카메라 한틀, 필름 한 드럼을 접수해 가지고 나왔다. 이 필름은 후지필름, 전쟁통에 한 오백만자 땅 속에 묻어놓은 것을 동경에서 주워오다시피 사들였다. 해방된 후에는 영화인들이 미군부대에서 나온 뉴스용 필름을 쓰고 있었는데, 이건 여름이면 녹기를 잘하기 때문에 활동사진용 필름이라면 다들 욕심을 내고 있었다.

뉴스를 백여다가 녹음, 현상까지 할 수 있도록 공보원 시설을 확대시켜놓은 뒤에 유장산(촬영), 이명우(촬영), 이경순(녹음) 모두 한참 활동할 기사들이 들어와 있게 됐다. 카메라맨만 여덟이 있었고 전부 해서 구십명 조금 넘게 같이 일했다. 말하자면 청부제도인 셈인데, 재료는 일절 미국에서 대주고 우리는 인력을 대는 방식으로 <대한전진> <세계뉴스> 등을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돈이 한달에 사백만원에서 육백만원까지 되었다. 뭐, 밥 먹을 시간도 없었고, 아침 여덟시에 시작하면 저녁 여섯시까지는 옴짝달싹을 못했다.

인민군의 지시로 ‘국립촬영소 남조선지부’를 만들다

그렇게 현상하고 녹음하면서 6·25를 만났다. 중앙방송에서는 “사수한다”를 반복하는데, 카메라맨을 내보내 살피는 전선은 꽤 불리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 뻥 터지더니 한강이 끊어졌다. 기계는 전부 녹음실에 모아놓고 집에 들어와 앉아 있는데, 영화동맹 친구들이 기계를 접수하겠다고 총들을 들고 우르르 들어왔다. 주인규, 강홍식이도 있고, 삼분의 일은 얼굴을 본 사람들이었다. 아직은 “동무” 그러지 않고 “형님” 그러는데, “형님은 아무 염려 마쇼. 협력만 해주십시오”. 협력도 좋은데 동생 명우 잡아간 일을 따지지 않을 수 없었다. “협력이라는 게 나만 협력이냐, 내 동생 내놓아야 되지 않니?”

들은 얘기로, 전부 묶여가지고 미아리 고개를 넘어가더라는 것이었다. 그때 잡혀간 것이 명우, 박기채, 최인규, 홍개명, 한 여섯 된다. 기계만은 안 뺏겨야겠다는 생각에 일을 합네 하고 기계를 살살 집어내 왔다. 옆에서 겁들을 내고 그러는데, “여기서도 죽고, 가도 죽고, 아무리 해도 죽는 건데 겁낼 필요없다”, 다독다독 해가면서 시키는 대로 현상실을 만들었다. 전선이 자꾸 남쪽으로 쫓겨내려가지만도 언제든지 일이 일어나면 대전까지는 후퇴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말을 들은 일도 있고 해서, 지연작전을 쓰리라는 계산으로 다 돼가는 공사를 말려가며 천천히 진행시켰다. 명칭은 국립촬영소 남조선지부라든가? 안 보이는 곳에다 만들라 해서 육상궁(毓祥宮·영조의 생모 숙빈 최씨를 봉사한 묘- 필자) 마루창을 뜯고 만들었다. 하루는 강홍식이하고 주인규가 먼저 이북으로 내려갈 사람이라며 명단을 죽 적어가지고 왔다. 영화학교를 모았으니 교장을 맡으라고 나를 앞세우고, 배우로는 유계선, 김신재가 걸려 있었다. “전부 평양 보내고 나면 여기 일은 누가 보겠는가?”, 남한 점령에 뜻을 둔다는 놈들이 생각이 모자라다고 앞질러 공격을 하고는 징발을 막은 일이 있다.

수복된 뒤에는 해군을 따라 진해에 내려가 있었는데 홍찬(<수일과 순애>(1931)에서 진행을 맡은 것으로 영화계에 입문, 해방 후에는 영화사 경영을 거쳐 안양촬영소를 설립하게 된다.- 필자)이가 안양에다 촬영소를 짓겠다고 사람을 보내왔다. 정부 돈을 얻어다 하는 것이지만 살아 있을 때 꼭 만들어보겠다는 그 의의가 좋아서 올라왔는데, 촬영소라고 지어놓은 것이 꼭 격리수용소 모양으로 해놨다. 설계도를 보여주는데 현상실을 연구실로 잘못 알아듣고는(현상실을 레버러토리라고 불렀다.- 필자) 현상실 복판에다가 변소를 채려놨다. 그 길로 중지시키고 새 설계도를 그려다줬다. 삼십오미리 렌즈를 사용하게 될 것, 시네마스코프될 것을 전부 계산해서 사백평 스튜디오로 확장 지시를 해놓았는데 낙성식을 하고 대통령이 온다고 난리가 났다. 이제 겨우 막대기 박아놓은 걸 뭘 구경하는가 싶어 걱정을 하고 있는데, 영감님(이승만- 필자)한테는 일본보다 낫다면 그만이라고, 이기붕이가 와서 귀띔을 해주었다. 일행을 앞세우고 죽 둘러보는데, 영감님 묻는 말이 “일본보다 난가?” “낫고 말고요. 사백평짜리 스타디오 방음장치 한 것은 일본에는 없습니다.” “좋아, 하게.” 그렇게 해서 다 짓지도 않은 촬영소를 허가받았다.

다 만들어놓고 나니 젊은 기사들이 전부 들어와서 흔들고 차지하지, 나는 고만 휴직처분 받았다. 경성촬영소(1934), 조선영화사(1937) 시설 다 해놓고 겨나고, 문화영화협회(1940) 해놓고 쫓겨나고, 안양촬영소(1957) 해놓고 또. 칠십 평생을 시설 갖춰주고 길 닦고 그것이 내 일이다 생각해보는 것이다.

정리 이기림/ 동국대학교 영화과 석사과정·이영일 프로젝트 연구원 marie3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