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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1968 vs 2001
2001-08-24

팀 버튼의 <혹성탈출>, 68년 원작과 이렇게 다르다 (2)

차이3 시대냐, 사회냐

이러한 측면에서 오리지널과 리메이크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하늘과 땅 차이로 갈린다. 바로 오리지널이 1960년대라는 ‘시대’를 은유했다면 2001년의 <혹성탈출>은 여전히 미국 안에 존재하는 흑과 백의 ‘사회’를 구체적으로 적시한다는 것이다. 68년의 오리지널은 인간사회의 복사판인 원숭이사회에서 자행되는 온갖 야만적인 행위들을 거울에 비춰보임으로써,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진실을 탄압, 은폐하고 거부하는 인간속성과 그것에 바탕을 둔 문명의 허구성을 통박했다. 그리고 그러한 문명의 최후는 모래 속에 파묻혀버린 자유의 여신상이 상징하듯이 비관적이기 그지없다. “결국 해버렸군(여기서 하다는 핵전쟁을 의미함). 이 어리석은 인간들아, 결국은 해버렸어.” 부서진 자유의 여신상 잔해 앞에서 통곡하는 찰턴 헤스턴의 울음 속에는 70년대 첨예했던 무의식의 파편들, ‘핵전쟁의 공포, 나사의 우주 개발에 대한 회의, 슬럼화되어가는 도시, 과학기술에 대한 불신’이 망라되어 있었다.

팀 버튼의 영화에서 이러한 다층적인 은유는 훨씬 단순화, 구체화된다. 그의 영화에서 인간 대 원숭이의 관계는 뛰어넘을 수 없는 생물학적 종의 차이라기보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데올로기의 차이에 의해 생성되는 듯 보인다. 이 영화에서 인간은 원작에서처럼 원숭이보다 하등한 영장류가 아니라 육체적인 연약함, 즉 힘이 없음에 의해서 노예 처지에 빠진 존재로 설정된다. 맨투맨의 싸움에서 인간은 절대 원숭이에게 이기지 못한다(레오가 원숭이를 일시적으로나마 물리쳤던 것은 우주선의 남은 핵연료를 이용한 머리싸움이었다). 인간 레오와 원숭이 아리간의 미묘한 감정상의 내통이나(우디 앨런의 <우리가 섹스에 대해서 궁금한 것들…> 이래 이런 사랑의 가능성을 다룬 영화가 가능키나 했을까?) “분리는 하지만, 차별하지는 않는다”는 노예상인 림보의 사탕발림 아부(그것은 전통적으로 미국의 흑-백 분리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슬로건이기도 하다), “우리 모두 그냥 함께 살 수 없나요?”라는 로드니 킹의 저 유명한 말을 차용한 대사는 모두 미국의 인종갈등에 대한 팀 버튼적 조롱이 담겨 있다.

차이4 인간과 원숭이, 누가 주인공이냐?

결국 팀 버튼은 자신의 전작 <화성침공>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철저하게 미국이 신봉하는 도그마들을 조롱하고 그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패러디한 갑옷의 문양에서부터 드러나는 광폭한 잔인함과 탐욕스러움 그리고 백인을 상징하는 오랑우탄의 지배계급, 황인종과 비슷한 침팬지와 하급군인을 이룬 검은 색의 고릴라로 철저하게 나누어진 계급사회의 문양까지. <혹성탈출>의 원숭이들은 철저하게 힘과 피부색에 의해 재편되고 이러한 모습은 바로 미국의 가장 재미없는 치부이기도 하다. 특히 언젠가 돌아온다던 원숭이의 구세주, 실은 우주선의 실험동물이자 주인공 레오의 애완동물인 침팬지가 서서히 우주선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광경은 바로 자신들의 신화를 위해 철저하게 백인 도그마를 만들어냈던 백인 문명사회에 대한 팀 버튼적인 조롱의 정점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혹성탈출>의 주인공 레오의 캐릭터가 평면적이라고 논박한다면 그것은 정말로 팀 버튼의 영화를 오독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은가. 지극히 냉소적이고 이성적이면서도 결국에는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양가적인 오리지널 캐릭터 테일러 중위와 달과 우주비행사 레오는 앞뒤가 딱 붙게 평면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원숭이들, 그중에서도 테드 장군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바로 검은 고릴라의 번쩍이는 안광이 형형한 두눈이고 끝은 신화화된 테드의 동상이었다. 테드가 자신에게 무릎을 꿇은 아리의 손에 “인간이 되고 싶었나? 그러면 인간의 문신을 가져”라며 낙인을 찍을 때, 번뜩이는 테드의 눈빛의 잔인함은 광기의 질투심과 권력에 대한 무한한 추구, 어리석은 자만까지 인간이 가진 모든 악덕을 망라해 보여준다. 프랭크 샤프너의 <혹성탈출>이 문명인에서 시작하여 원시인으로 끝이 난다면, 팀 버튼의 <혹성탈출>은 원숭이에서 시작하여 원숭이에서 끝이 나는 것이다.

팀 버튼의 <혹성탈출>, <화성침공>의 음화

결국 팀 버튼은 자신의 세계관 어떤 것도 변화시키지 않는다. <비틀쥬스>에서 선배유령이 했던 그 유명한 대사 “산 것들은 절대로 믿지 말라고”(Never trust the living)의 슬로건은 탐사선 오베론에선 ‘살아 있는 것들 주의’(Caution: Living Animals! )라는 표어로 다시 한번 계시된다. 오베론의 형상은 팔을 벌린 인간의 모양이고 인간을 계시하는 낙인 역시 바로 그 오베론의 형상이었다. 오베론은 우주를 떠돌아 다니는 거대한 노아의 방주였고, 분명한 것은 우리의 원숭이들은 지금 이 시간에도 우주를 떠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도 한때는 유인원의 일종이었으면서도 여전히 인간이라는 격상된 단어로 부르는 원숭이로서의 우리 말이다.

팀 버튼이 아니더라도 2001년의 <혹성탈출>도 이미 속편을 예비하고 있는 듯 보인다. 2029년의 레오가 2400년의 미래로 갔다 다시 2150년대의 근미래로 되돌아가는 설정은 <혹성탈출>이 <백 투더 퓨처>류의 시간여행을 보여줄 가능성을 농후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팀 버튼이 재현했던 원시림 가득한 원숭이 혹성은 다시는 재현되지 않으리라. 팀 버튼과 스탭들의 말대로 <혹성탈출>은 결코 1968년 <혹성탈출>의 리메이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팀 버튼의 <혹성탈출>은 지독한 백인사회에 대한 조롱극 <화성침공>의 음화는 아니었나?

반복될 <혹성탈출>에서 <에이리언3>에서 그러했듯 원숭이의 유전자 조각을 지닌 인간들을 봐도 더이상 놀랄 것은 없을 것 같다. Caution: Living ‘Every’ Animals? 아무튼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간에 팀 버튼이 <혹성탈출>에서 해내지 못한 것을 다시 해낼 감독은 없으리라. 혹시 세상의 왕인 제임스 카메론이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kss1966@unitel.co.kr

▶ 팀 버튼의 <혹성탈출>, 68년 원작과 이렇게 다르다 (1)

▶ 팀 버튼의 <혹성탈출>, 68년 원작과 이렇게 다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