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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해결사가 필요해

최근 개봉작 중 일본의 판타지멜로 <천국의 책방>과 스파이크 리의 <인사이드 맨>에는 공히 ‘해결사’가 나온다. <천국의 책방>에선 1인2역의 다케우치 유코가 천국과 지상에서 활약을 펼치는데 죽음이 갈라놓은 사랑이 달짝지근한 봉합을 향해 달려간다. 해결사는 천국의 책방 주인 야마키다. 이승과 저승 사이의 경계선 따위는 야마키의 봉사정신을 막지 못한다. 그는 정확한 예지 능력과 스타일을 갖춘 천사표 중년 남자다. <천국의 책방>이 선사하는 가공할 판타지의 완성은 야마키의 대가없는 노고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인사이드 맨>의 매들린(조디 포스터)은 상류계급만 상대하는 로비스트인데 돈과 권력의 급소를 찌르고 어르며 목표를 이뤄가는 솜씨가 마피아 뺨친다. 받은 대가만큼 문제를 해결하는 매들린의 존재감이 야마키보다 현실적인데, 갖가지 유형의 해결사가 걸핏하면 영화에 등장하는 이유는 괄호쳐진 현실의 구멍들을 메우기 위해서일 거다. 해결사는 장르영화의 해결사다.

해결사의 위대함을 고통스럽게 절감하는 요즘이다. 과거, 여자친구가 모종의 문제로 고통스러워할 때, 머리를 쥐어짜서 발생 원인, 해결 비책, 대처 요령 등을 나름대로 늘어놓다보면 갑자기 불호령이 떨어진다. “내가 언제 해결해달라고 했어? 얘기 들어달라고 했지!” 해결은커녕 쌈박질로 끝나기 일쑤였다. 연애 1, 2, 3이 매번 마찬가지였는데 여기까지는 그래도 낫다. 나이가 드니 회사에선 책임져야 할 이런저런 일들이 많아지는데, 엇비슷한 사람들의 능력과 욕망과 질투심과 폭주하는 업무량의 교차로 사이에서 길을 잃고는 한다. 교통정리한다고 나섰다가 거꾸로 분란도 일으킨다. 정말 여기까지는 그래도 낫다.

술자리에서 알게 된 젊은 처자로부터 자정 무렵 전화를 받았다. 술먹겠냐고 하기에 반갑게 나갔다. 2시간이나 있었을까,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헤어졌다. 집에 들어온 직후 전화가 왔다. “힘들어서 시골집에 가 있으려고요. 당분간 연락 안 될 거예요.” 그런가보다 했다. 다음날 오후, 그녀의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별일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만났다던데….” 그녀는 나와 헤어진 직후 자살을 감행했다. 아침에 중환자실로 실려갔고, 한달쯤 입원해야 한다는 전언. 어떤 상념이 일주일쯤 머리에 붙박혔다. 이유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둘이 앉아 술마신 게 그때가 처음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서로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왜 하필 나를 끝으로 만났을까, 충동이었을까 계획된 것이었을까, 그녀의 시도가 그대로 성공했더라면 어찌 됐을까 등등의 생각이 꼬리를 물었지만 결정적인 문제는 내가 아무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자살 시도는 ‘나 좀 살려줘’라는 일종의 구조요청이라는 요지의 책을 본 적이 있다. 그녀가 마지막에 자기를 기억해줄 수 있느냐는 말을 했지만, 이 유일한 힌트를 난 술김이려니 흘려들었다. 그녀의 ‘구조요청’이 나를 겨냥한 건 아니지만 여기서 이건 중요하지 않다.

실은 나는 나 자신을 위한 해결사도 되지 못한다.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는데 이웃을 구원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쿨한 연애론과 무자식주창론에 솔깃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런데 더불어 산다는, 이 닳고 닳은 말의 의미가 요즘처럼 뼛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느낌은 처음이다. 야마키 같은 해결사는 언감생심이지만, 시늉이라도 해야 한다는 각성이 밀려온다. 그래야 나도 이따금 구조요청을 보낼 것 아닌가. 아~, 근데 각성한다고 문제가 해결된다면, 해결사는 필요없을 텐데 하는 이상한 회의론이 다른 한켠에서 밀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