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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제작일지
2001-08-24

<무사> 제작일지 (2)

2000년 9월5일

밤장면을 찍을 때 보통 촬영 종료시간은 새벽 5∼6시. 그런데 오늘은 3시30분에 끝나버렸다. 일찍 끝났다는 사실에 좋아하며 정리하려고 하는데, 감독의 목소리가 들린다. “촬영감독님, 한번만 더 가죠.” 분명 OK사인을 내렸는데 다시 찍자는 감독의 말에 김형구 촬영감독이 왜 그러는지를 묻자 감독이 악동 같은 얼굴로 대답한다. “너무 일찍 끝났어…. 이러면 안 되는데. 우리 찍기로 한 시간까지는 찍어야 되잖아.” 어이없어하는 촬영감독, 조명감독 그외 모든 스탭, 배우들. 감독은 여전히 애처럼 떼를 쓴다. “촬영감독님, 한번만 더 가자니깐…. 가야 돼∼.”

2000년 9월6일

새벽에 촬영이 조금 일찍 끝났다고 오전에 다시 기상해서 오후 촬영에 들어갔다. 다들 지친 기색이 역력하다. 스케줄이 밀리고, 제작비는 초과하고, 그러다보니 강행군을 멈출 수 없고….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다. 내일은 또 5시 기상이다. 한달이 지났는데 30%도 못 찍었다.

2000년 9월12일

추석이다. 아침에 약소하나마 합동차례를 지냈다. 촬영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하늘을 보니 둥근 달이 떠 있다. 참 크다. 왜 그런지 몰라도 중국의 달은 서울보다 크다. 내일 드디어 사풍계곡의 전투장면을 본격적으로 찍는다.

2000년 9월13일

정말 죽는 줄 알았다. 가남(박정학) 앞으로 말 5마리가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것이 아닌가. 도저히 피할 시간도 공간도 없는 한순간, 난 눈을 감았다. 엄청난 사고가 닥쳤다는 불안감에 등골이 서늘했다. 눈을 떠서 보니 가남이 그대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모두 일제히 가남에게 달려갔다. 얼굴이 조금 찢어지고 다리에 타박상을 입었을 뿐이다. 기적 같은 일이다. 왜 도망가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나도 도망가고 싶었지. 근데 도망갈 데도 없고, 도망가면 더 다칠 것 같고, 그리고 도망가서 NG나면 이 장면 또 찍어야 되는데….” 물론 이 장면은 OK였다. 돌진하는 말을 피할 수 없자 가남이 택한 방법은 들고 있던 가짜칼로 말 다리를 때린 것이었다. 덕분에 말들이 가남을 피해갔는데 만약 진짜 충돌했더라면…. 상상하고 싶지 않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 <무사> 현장에서 말은 언제라도 대형사고를 불러올 존재였다. 잘못 말 뒤에 서 있다 뒷발에 차인다거나 말에 깔리는 날에는 아무리 통뼈라도 으스러져버린다. 본격적인 전투장면을 찍기 시작하면서 사고위험이 곳곳에 출몰한다. 주진모도 오늘 다리를 다쳤다. 몽고군과 싸우는 장면을 찍다 구덩이에 빠져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다리는 금방 퉁퉁 부어올랐다. 감독이 말한다. “어쩌냐? NG야. 한번 더 찍자!” 주진모의 얼굴이 흙빛이 된다. 감독이 씩 웃으며 말한다. “오케이야. 오케이.”

2000년 9월15일

오늘도 사풍계곡 전투장면이 이어진다. 오늘 드디어 로빙화와 황지차이를 보내기로 했다. 로빙화와 황지차이는 주진군으로 나오는 중국인 배우들로 현장에서 가장 미움받는 존재들이었다. 슛이 들어간다고 해도 어디론가 사라지기 일쑤이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간섭하고 방해하고. 다들 ‘쟤들 언제 현장에서 사라지나’ 하는 심정이었다. 오죽하면 중국스탭마저도 연출부에게 “저 둘은 언제 죽냐?”고 물어볼 정도이니. 로빙화와 황지차이는 원래 이 장소에서 죽을 운명이었지만, 연출부와 중국스탭 모두 어떻게 죽일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며칠 전부터 했다. 화살에 맞혀 죽인다, 창을 찔러 죽인다, 아니 말에서 떨어지게 해야 한다…. 잔인한 논의지만 스탭들은 신이 났다. 둘 때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하나도 불쌍하지 않다며 좀 아프게 죽여야 된다는 데 의견일치를 봤다. 어쨌든 로빙화는 칼에 맞아, 황지차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둘이 죽는 장면을 찍을 때, 스탭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런데 로빙화는 죽고 나서도 말썽을 부린다. 전투가 끝난 뒤 상황을 찍기 위해 시체처럼 바닥에 누워 있으라는데 가만히 있지를 않는다. 칼을 들고 다니며 시체끼리 수다를 떨고, 슛이 들어갔는데도 뻔뻔스럽게 말을 타고 다니며 소음을 낸다. 마지막으로 매장하는 장면까지 찍은 뒤 현장 최고의 말썽배우 로빙화와 황지차이의 분량이 끝났다.

2000년 9월26일

날씨가 도와주지 않는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아침에도 부슬부슬 계속 내렸다. 싼관의 스산한 날씨는 사람을 오싹하게 한다. 오늘 정두홍 무술감독의 액션스쿨팀 박근석씨가 말에 채였다. 벌써 말에 채이는 사람이 몇 사람인지 모르겠다. 아무리 조심해도 사고가 끊임없이 생긴다. 연일 계속되는 강행군에 스트레스를 받는 건 사람만이 아닌지 요즘 말들의 신경이 날카롭다.

2000년 9월30일

예상치 않은 적군의 습격을 받았다. 몽고군도, 명군도 아닌 적군에게 우리는 그저 신음소리만 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 적군은 날파리떼였다. 촬영 도중 갑자기 하늘을 까맣게 뒤덮으며 나타난 날파리떼에 촬영은 일시 중단되고 다들 자신에게 달려드는 날파리떼를 쫓느라 정신이 없다. 날파리떼는 눈, 코, 입 어디든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날파리떼는 1시간 정도 촬영장 주위를 맴돌다 사라졌다. 1시간이 10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옷과 모자에 눌러붙은 날파리떼의 흔적들이 경악스럽다. <대지>에서 묘사했던 메뚜기떼의 습격이 이런 것이었을까? 중국은 역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자연현상들로 가득 찬 나라다.

2000년 10월2일

장쯔이는 훌륭한 배우다. 그녀를 캐스팅할 때 현장에서 마찰을 빚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특히 오늘 밤촬영에서 보여준 장쯔이의 모습은 정말 마음에 든다. 오늘 장쯔이는 몸이 안 좋았다. 감기몸살로 콜록거리는데다 추운 날씨 때문에 몸을 떠는 게 보였다. 주진모와 장쯔이가 대화하는 장면을 찍는데 테이크를 14번이나 갔다. 긴 중국어 대사를 해야 하는 주진모가 대사에 신경쓰다보면 감정이 안 잡히고, 감정을 살리다보면 대사가 꼬이는 실수를 연발했다. 장쯔이는 상대방이 연신 NG를 내는데도 화내지 않고 상대 연기자를 배려했다. 빨리 찍고 들어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전혀 내색하지 않고 주진모가 실수하는 중국어 발음을 애써 가르쳐준다.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배려하는, 얼마나 예쁜 모습인가? 10번째 테이크가 넘어가도 NG가 나자 주진모가 쓰러진다. 본인은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배우라는 직업이 얼마나 힘들고 고된 일인지를 실감할 수 있는 순간이다. 마침내 감독의 최후통첩이 떨어진다. “이번에도 안 되면 그냥 가자. 내일 찍자.” 내일? 내일은 휴일로 내정(?)했던 날인데…. 꼴깍, 스탭과 배우들이 침넘기는 소리가 들려온다. 14번 만에 OK사인이 떨어지고 스탭, 배우 모두 기뻐하며 폴짝폴짝 뛰었다.

2000년 10월6일

53회 촬영, 필름 13만5천자 사용을 끝으로 은천에서의 마지막 촬영을 마쳤다. 이제 스탭들은 4박5일의 짧은 일정이지만 한국에 돌아가 휴식하게 된다. 사실 촬영지를 베이징 근처로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만큼이다. 말을 실은 트럭이 4일을 달려야 베이징에 도착하게 된다. 다들 한국에 가지만 난 비행기를 타고 베이징에 가야 한다. 미리 준비해야 될 게 많다.

2000년 10월8일

아내와 아이가 베이징에 왔다. 야호!

2000년 10월10일

그녀와 재서가 한국에 내일 간다. 보고 싶어 어쩌나!

2000년 10월14일

영화의 도입부인 향산석성장면, 못다 채운 컷, 프레임을 짠다. 그물처럼, 뜨개질처럼 짠다. 감독이 짜넣는다. 스탭이 채워놓고 배우가 그 영혼을 완성한다. 영화란 그렇게 누군가 채워넣은 것이다. 부디, 이 영화 <무사>를 완성케 하소서. 새롭게 시작하며.

2000년 10월24일

베이징 근교 베이자이에서 숲 전투장면을 찍었다. 피탄을 심어놓고 화살을 맞는 반응숏부터 시작한다. 내가 알기로 <무사>는 화살에 맞을 때 피가 튀는 장면을 처음 시도한 영화다. 피탄을 심는 아이디어는 정두홍 무술감독이 냈다. 옷 속에 피주머니와 작은 화약을 넣고 타이밍을 맞춰 폭파시키면 실감나게 피가 튄다. 이렇게 찍은 장면을 나중에 컴퓨터그래픽으로 그린 화살과 합성하면 되는 것이다. <무사>에는 말이 3마리 이상 한꺼번에 쓰러지는 장면도 있다. 원래 말 쓰러트리는 장면은 달려오는 말 양쪽에서 사람이 줄을 당겨 만든다. 팽팽한 줄에 말다리가 걸리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물론 낙하지점에 스티로폼과 모래를 깔아 충격을 막는다. 또다른 방법은 전기충격이다. 말이 놀랄 정도의 전압을 갑자기 주면 달려오던 말은 가속도를 이기지 못해 앞으로 고꾸라지게 된다. 이 전기장치를 중국에서 처음 발견한 뒤 즉시 한국에 보냈다. 세운상가에 가져가서 복제품을 여러 개 만들어오라고. 문익점이 목화씨를 숨겨온 것처럼 우리는 말 쓰러트리는 장치를 몰래 빼돌렸다가 썼다(혹시 중국 공안에 걸리는 건 아니겠지). 처음 몇번은 생각처럼 말이 쓰러지지 않아 걱정했다. 전기장치를 눌렀는데 말이 약간 찌릿하는 표정을 짓더니 그냥 내달리는 것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마음약한 우리 특수효과 담당이 원래 장치보다 훨씬 낮은 전압을 사용한 탓이다. 전압을 올리자 제대로 작동했고 우리는 말 3마리가 한꺼번에 앞으로 고꾸라지는 스펙터클을 잡는 데 성공했다.

2000년 10월26일

<무사> 현장에는 베이징에서 의학공부를 하는 유학생들이 있다. 스탭, 배우 모두 그들 덕을 톡톡히 봤다. 액션장면이 많다보니 다치는 사람도 많고 감기환자부터 크고 작은 질병이 끊이지 않는다. 감독도 위통 때문에 약을 달고 산다. 아픈 사람이 너무 많다.

2000년 10월27일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다. 시월이 간다. 곧 겨울이다. 영화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영화를 찍는다. <무사>를 무식하게 찍으면서, 그 사실을 알았다. 재서야! 재하야! 내 그리운, 아들들아. 무척, 보고 싶다

2000년 10월28일

오늘부터 3일간 24시간 촬영이 이어지는 죽음의 스케줄이다. A팀은 낮촬영만 하고 철수하고, B팀은 밤촬영까지 마치고 새벽 1시 숙소로 귀가, 하지만 내일 기상시간은 모두 새벽 5시다.

▶ <무사> 제작, 그 천일간의 기록

▶ <무사> 제작일지 (1)

▶ <무사> 제작일지 (2)

▶ <무사> 제작일지 (3)

▶ 숫자로 본 <무사>

▶ <무사> 등장인물

▶ <무사> 스탭

▶ <무사>가 달려온 길

▶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1)

▶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