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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제작일지
2001-08-24

<무사> 제작일지 (3)

2000년 11월6일

<무사>의 마지막 촬영지인 씽청으로 간다. 베이징에서 차로 6시간. 후팅샤오가 지은 토성은 수백년 시간의 손길이 쓸고 지나간 듯 거기 서있다. 고려의 아홉 무사들이 고향에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해안토성에 도착했듯 우리 스탭도 마침내 이곳에 이르렀다.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덜덜 떨리는 이 추위에 우리는 비까지 뿌려가며 촬영을 해야 한다. 다들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럴 것이다. 우리에겐 물러설 곳이 없다.

2000년 11월10일

눈이 와서 이틀간 촬영을 못했다. 눈이 오는 걸 보며 스탭들이 술렁인다. ‘올해 집에 돌아가기 힘들겠구나’ 하는 표정이다. 스케줄이 말썽이다. 장쯔이와 우영광(몽고군 장군 람불화 역)을 내년까지 붙잡을 수 없다. 둘 다 12월에 다음 영화 스케줄이 시작된다. 날씨도 문제다. <무사>에는 눈오는 장면이 없는데 12월 들어가면 눈 때문에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지 모른다. 내년에 다시 와서 찍는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감독과 대책회의를 했다. 스탭, 배우를 불러모아놓고 “12월20일까지 끝내겠다”고 발표했다. 대신 그렇게 하자면 24시간 촬영을 계속해야 한다. 눈과 추위가 등 뒤에서 우리의 빈 틈을 노리는 것 같다.

2000년 11월12일

11월인데 체감온도가 영하 20도다.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릴 수 있는 모든 부위를 가리고 다녀도 거센 바닷바람이 옷 속으로 파고든다.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숙소에 들어오는 시간은 밤 12시. 석달 동안 미친 듯이 찍었는데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힘들고 지친다.

2000년 11월15일

미처 한 컷도 찍기 전에 정우성이 다리를 다쳤다. 액션신을 찍으며 착지하다 발목을 삐끗했다.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1주일간 절대안정. 절대안정? 그럼 촬영은? 다들 신경이 날카롭다.

2000년 11월20일

몹시 춥다. 토성에서 촬영을 시작한 뒤 가장 추운 날씨 같다. 카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다른 기계들도 얼었다. 장비보호문제가 녹록지않다. 모두들 지쳐 있다.

2000년 12월3일

아무리 힘들어도 웃고 떠들던 스탭들이 요즘 조용하다. 감독도 예전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고 다들 얼굴이 상했다. 추위 속 강행군에 체력은 물론 정신까지 피폐해지고 있다. 너무 지쳐보이는 스탭에게 “먼저 떠나고 싶은 사람은 가도 된다”고 했더니 “억울해서 못 간다”고 했다. 그렇다. 억울해서 끝까지 한다는 심정이다. 지금은 끝이 보인다는 게 유일한 희망 같다.

2000년 12월10일

100회차 촬영. 마지막 전투에 앞서 인서트 장면을 찍는다. 원래 비를 뿌리며 촬영할 계획이었으나, 기후를 고려해 눈과 화공으로 바뀌었다. 바다가 얼어붙는 혹한에 비를 뿌리며 찍는다는 건 얼음지옥을 의미한다. 영하의 날씨에 카메라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데 비까지 뿌리며 촬영한다는 건 불가능했다.

2000년 12월11일

본격적인 원기병의 화공 촬영을 시작한 현장은 진짜 전쟁터였다. 감독은 고함을 질러대고 감독의 고함소리에 뛰고 또 뛰는 제작부와 연출부, 성 여기저기서 일렁거리는 불길에 말들이 놀라 우왕좌왕한다. 밤촬영은 여솔이 성 밖에 묶여 신음하는 장면. 영하 17도 날씨에 정우성은 웃옷 자락을 모두 벌려 맨가슴을 드러내놓고 손까지 묶은 채 촬영을 한다. 컷소리가 날 때마다 매니저와 스탭이 달려들어 마사지를 하고 전기난로를 들이대지만 시퍼렇게 질린 얼굴색은 좀처럼 돌아올 줄 모른다. 마비 증상까지 보인다. 떨고 있는 정우성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뜻하지 않은 부상으로 애태웠던 기억이 악에 받친 연기로 돌변하고 있다.

2000년 12월15일

등장인물이 하나둘 죽어감으로써 영화가 끝나가고 있다.

2000년 12월 21일

장쯔이의 마지막 촬영. 할리우드에서 찍는 영화 스케줄 때문에 장쯔이는 내일부터 <무사>현장에 나올 수 없다. 부용 공주 장면을 마무리짓기 위해 하루종일 점심도 못 먹고 강행군했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지금까지 꿋꿋하게 촬영에 임했던 장쯔이도 마지막 컷소리에 눈가가 촉촉해졌다.

2000년 12월22일

마지막 촬영이라는게 실감나지 않는다. 오후 4시쯤 촬영장을 몰래 나와 근처에 있는 무덤으로 갔다. 술병과 향을 들고 혼자 그곳에서 경건한 마음으로 제사를 지냈다. 영화현장을 지키는 신이 있는지 없는지 몰라도 <무사>가 지금까지 온 것은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힘이 도왔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절로 경건해진다. 해가 지고 마지막 컷소리가 났다. 잠시 침묵... 모두 얼싸안는다. 다들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친다. 사실 나와 감독은 각오하고 있었다. 그간 워낙 악독하게 해온 터라 스탭들이 때리거나 바다에 빠트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도 그러지 않고 대신 포옹을 해줬다.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다들 수고했다.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에필로그

12우러28일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감독과 난 베이징공항을 향했다. 공항엔 프로듀서 장샤, 미술감독 훠팅샤오, 의상담당 황바우룡 등 중국스탭들이 나와 있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울기 시작했다. 선글라스를 쓴 감독도 고개를 돌린다. “아이, 촌스런 새끼. 그러게 나오지 말라고 그랬잖아.” <무사>를 통해 정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중국 스탭들은 우리에게 마음을 줬다. 그들이 아니었으면 <무사>를 만들 수 없었으리라. 그들의 얼굴이 하나둘 떠오른다. 고맙다. 진심으로. 다시 그들과 작업한다면, 행복할 것 같다.

서울로 돌아와 30만자 필름을 아비드 편집기에 입력하는 데만 한달이 걸렸다. 2월부터 한달간 편집, 3월에 호주로 건너가 3달 넘게 이어진 사운드 작업, 마침내 <무사>가 완성됐다. 우리가 흘린 땀과 눈물과 수고로움이 헛되지 않기를...

조민환/ 싸이더스 이사 · 영상사업부문장

▶ <무사> 제작, 그 천일간의 기록

▶ <무사> 제작일지 (1)

▶ <무사> 제작일지 (2)

▶ <무사> 제작일지 (3)

▶ 숫자로 본 <무사>

▶ <무사> 등장인물

▶ <무사> 스탭

▶ <무사>가 달려온 길

▶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1)

▶ <무사> 김성수 감독 인터뷰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