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Culture > 초이스 > 포커스
셀러브리티 프로그램 [1]
김현정 2006-05-17

“당신의 가십과 스캔들까지 사랑해”

코미디언 데브라 윌슨이 TV 프로그램에 나와 “바비는 정말 최고의 남편이에요. 아, 그런데, 내 약이 어디있죠?”라며 약물중독에 빠진 휘트니 휴스턴을 비웃는다. 한국이었다면 그 프로그램은 다음 에피소드 앞에 사과자막을 내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방송사 E엔터테인먼트와 윌슨은 다음에도, 그 다음에도, 명사와 스타를 비웃으며 꿋꿋하게 방송을 계속했다. 요즈음 케이블TV 프로그램에서 비중이 늘어나고 있는 셀러브리티 프로그램들은 이처럼 한국 연예프로와는 다른 재미로 시선을 끌고 있다. 그 프로그램들엔 연예인이 아니더라도 ‘셀러브리티’라 불리는 상류사회의 존재와 스캔들에 너그러운 개방적인 태도, 재치있게 풍자하고 공격하는 화술이 있기 때문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기 힘든 셀러브리티 프로그램들. 그 중독자의 고백 수기가 여기에 있다.

많은 이들이 연예기자와 영화기자를 구분하지 못한다. 최소한 영화기자 K의 친구들은 그러하여 몇달 만에 그녀를 만나면 영화배우 A와 B가 동거를 하는지, C와 D는 헤어진 것이 맞는지, 간절하게 묻곤 한다. 그때마다 K는 버럭 호통을 치며 지적이고 예리한 기자의 이미지를 만들어보려고 애를 써왔지만… 아주 사소한 대화 끝에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문득 깨닫고야 말았다. 그녀는 <웨스트윙> <위즈>의 메리 루이스 파커의 연기력을 칭찬하는 후배의 말을 듣다가 <할리우드 결별 스토리>였던가를 떠올리며 이렇게 내뱉었던 것이다. “있지, 그 여자가 임신했을 때 남자친구가 바람나서 차버린 거 알아? 상대가 클레어 데인즈였는데 둘이 어떻게 만났느냐 하면….” 그랬다. 한동안 잊고 있었지만 K는 <대부3>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위노나 라이더가 실연으로 출연을 포기했다는 사실만 기억하던 십대였다. 개꼬리 삼년 묻어둬야 황모가 될 리 있나. 서른이 넘은 K는 출근시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스타스타일> <스타 스캔들> <라이프 오브 럭셔리> 등을 찾기 위해 리모컨이나 누르고 있는 셀러브리티 프로그램 중독자가 되었다.

<스타 스타일>

<라이프 오브 럭셔리>

한때 K는 패리스 힐튼이 누구인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그 애완견 팅커벨의 단골 옷집이 ‘피피 앤 로미오’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다. 어째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기억을 더듬던 K는 몇년 전 미국의 연예TV방송사 E엔터테인먼트와 처음 조우하던 순간을 기억해냈다. K가 케이블TV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발견한 <The 101> 시리즈는 주제를 바꿔가며 순위를 매기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날 방영된 에피소드는 실수담인 <101 할리우드 Oops!> 중의 하나였다. 줄리아 로버츠가 소매없는 드레스 밑으로 체모를 드러낸 장면을 보며 K는 먼 옛날 한국 여배우가 모근을 제대로 제거하지 않고 나온 샴푸 CF를 두고 친구들과 수다 떨던 추억을 떠올렸고, 멀리서 가십과 스캔들의 세계가 그녀를 부르는 환청을 들었다. 그날 이후 K는 <섹스&시티>와 셀러브리티 프로그램이 충돌할 때면 주저하지 않고 후자를 택하게 되었다.

가십 습득 및 논평의 경지에 도달한 K

K를 신천지로 인도한 E엔터테인먼트는 <101 스타메이크오버> <101 할리우드 워스트 패션> 등을 계속 내놓았다. 1위가 누구인지 궁금해 출근도 미루던 K는 소파에 들러붙어 코를 수술해 평범한 얼굴이 되어버린 제니퍼 빌스의 판단착오를 안타까워하고, 마이클 잭슨의 얼굴이 변해온 역사에 경악하고, 파멜라 앤더슨과 토미 리의 결혼과 이혼 스토리에 논평까지 다는 경지에 이르렀다(전에는 파멜라 앤더슨 남편이 동명이인 토미 리 존스인 줄 알았었다). K가 조금만 생각이 깊었더라면 E엔터테인먼트가 싼값에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송사로 악명이 높다는 사실을 짐작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K가 애청하는 <스타들이 사는 법>의 제작사이기도 한 E엔터테인먼트는 토크쇼와 홍보용 클립을 짜깁기하고, 모 광고회사가 일명 ‘X 파일’ 만들듯 몇몇 기자와 잘나가지 못하는 연예인들의 코멘트를 덧붙여 프로그램을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K는 다만 궁금했다. 나는 최민식이 어느 동네 사는지도 모르는데 <피플> 기자는 어떻게 존 트래볼타네 침실 수와 인테리어 컨셉까지 알고 있는 걸까.

<스타의 신혼>

<101 크레이지 TV 스타>

먼 나라 기자의 취재력을 동경하며 K는 날이 갈수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섭렵하게 되었고 나름대로 프로그램 사이를 연결도 할 줄 알게 되었다. <101 할리우드 Oops!>에 등장한 스타 중 한명은 가수 제시카 심슨이다. K는 심슨이 참치가 닭고기인 줄 알았다고 놀리는 패널들을 보며 무슨 말일까 궁금해하다가 한참이 지난 뒤에 <스타의 신혼> 재방송을 보고 비로소 깨달음을 얻었다. <스타의 신혼>은 심슨과 남편 닉 러세이의 신혼생활을 찍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인데, 정말 리얼하게도, 심슨은 ‘바다의 닭고기’라고 적힌 참치캔을 보고 참치가 치킨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다시 한참이 지나고 심슨은 바바라 월터스와 아주머니 몇명이 진행하는 <더 뷰>에 출연하여 자신은 머리가 좋지만 프로그램 컨셉 때문에 바보인 척했다고 증언했다. 모를 일이었다. K는 같은 프로그램에 패리스 힐튼이 나와 자신은 머리가 좋다고 주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저 저 프로그램의 컨셉이겠거니 믿기로 결정했다.

사진제공 온스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