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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브리티 프로그램 [2]
김현정 2006-05-17

각종 정보를 현실에 활용하기로 한 K

<101 할리우드 워스트 패션>

그렇게 중독증세는 심화되어갔지만 K는 일말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했다. 그녀는 할리우드 배우를 직접 취재하지 못한다면 정보라도 풍부하게 알아야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다고 주장했고, 가끔은 그 정보들을 현실에 투영했다. 그녀가 몸담고 있는 회사가 ‘아름다운 영화인’이라는 제목의 기부 캠페인을 벌일 무렵이었다. 스타들이 돈쓰는 법에 관한 프로그램인 <스타들이 사는 법> 등에 푹 빠져 있던 K는 한국의 배우들도 기부문화에 익숙해져야 한다며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프로강사를 초빙하여 빈민가 아이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야기와 피어스 브로스넌이 암과 동물보호 재단에 정기적으로 기부를 한다는 미담을 늘어놓았다. 르네 젤위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입은 카나리아색 드레스를 칭찬하는 <스타 스타일>을 인용하며 다른 형식의 아카데미 기사를 시도해보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그런 정보를 이용하여 좋은 기사를 쓴 적이 없다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편집장이 안다. 교훈은 얻었다. K는 어떤 기자가 “브래드와 제니퍼는 뭔가 달라요.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커플이죠”라고 했다가 얼마 뒤에 “브래드는 안젤리나 같은 여자를 원했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며 말을 아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 기자는 몇년 사이를 두고 출연한 프로그램이 타국에서 몇달 사이를 두고 방영될 줄은 몰랐을 거다.

어쩌면 K는 그저 셀러브리티 프로그램이 재미있고 좋을 뿐인, 게으른 카우치 비어인지 모른다(감자칩을 먹는 대신 맥주를 마시니까). K는 심지어 <할리우드 몸짱스타>라는 낯뜨거운 제목의 프로그램마저 낯뜨거워하며 재미있게 보곤 했다. 그 프로그램에 따르면 탄수화물은 악마의 유혹이어서 ‘몸짱스타’들은 초밥을 먹어도 위에 얹은 회만 먹고, 이틀에 한끼 정도 빵을 먹는 것은 체중에 대한 강박관념이 덜하다는 증거이므로 자랑거리에 속한다. 그럴 바엔 회를 먹지 왜 초밥을 먹는가. 맥주 안주로는 김밥이 매우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K는 명사의 일상 전반을 다루는 <셀러브리티 라이프>를 보며 공설운동장만한 집을 가진 힐튼 자매를 두고 “그렇게 마른 여자들이 이런 큰집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어요” 비아냥거리는 패널에게 무한한 공감을 보내는 것이었다.

급기야 셀러브리티에 대한 애정을 확인한 K

<심플 라이프>

시간이 흐르며 K는 자신의 중독증세가 점차 확장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심플 라이프>를 보기 시작했을 때 K는 패리스 힐튼과 라이오넬 리치의 딸 니콜의 행태가 못마땅했다. 처음으로 노동을 하겠다고 나선 그들은 우유를 병에 담기 귀찮다고 바닥에 쏟으며 장난을 쳤고, 순진한 시골 소녀를 쇼핑몰에 데려가 엄마 카드로 수백달러를 쓰게 만들었다. 카드대금을 막지 못해 현금서비스를 받고, 다시 그 카드대금을 막지 못해 고민에 빠졌던 K는, 그 상황이 심각하다는 걸 짐작하고도 남았다. 그러던 어느 날, K는 인터넷 쇼핑몰을 돌아다니다가 패리스 힐튼이 디자인한 주얼리 브랜드에 한참 머물러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K는 좋아하는 셀러브리티 프로그램 거의 전부에 나타났던 패리스 힐튼에게 정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힐튼이 어색한 조연으로 출연한 <하우스 오브 왁스>를 보며 저것이 바로 왁스 인형이 아닐까 의심했던 K로서는 스스로가 싫어질 법도 했으나… 그녀는 술을 마시며 고백했다. “나 패리스 힐튼 좋아해.” 그 부끄러운 고백은 <패리스 힐튼 다이어리> 증정본이 회사에 배달되자 처음 읽을 수 있는 권리를 얻음으로써 보상을 받았다.

아직도 K의 친구들은 연예기자와 영화기자를 구분하지 못한다. K 또한 영화배우 A와 B가 동거를 하는지 서로 만나본 적이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K는 더이상 호통을 치지 않고 주변에서 오가는 잡담을 기억해두었다가 친구들에게 얘기해줘야지 다짐하곤 한다. K는 심각한 사람이 아니지만 그녀가 사는 세상은 가끔 심각한 지경으로 몰락하기 때문이다. 그런 순간 가십과 새로운 스타덤과 스캔들 천지인 <올 액세스>로 도피할 수 있는데 어째서 마다해야 한단 말인가. K가 팅커벨의 2천달러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보며 얻는 건 부의 편중을 향한 분노가 아니라 근심걱정없어 보이는 별천지가 주는 망각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K는 <101 셀러브리티 핫바디>에 빠져 기사를 조르고 있는 노트북의 하얀 화면을 잠시 잊어버리는 것이다.

유효기간이 찍힌 신데렐라가 되는 법

상류사회 체험 프로그램 <워너비 힐튼> <켑트>

자동차를 타고 들어가야만 하는 대저택과 통장 잔고를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쇼핑은 많은 이들의 꿈일 것이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은 바로 그런 꿈을 현실로 제시하며 수천명의 도전자를 궁지로 몰아넣었지만, <도전! 슈퍼모델> <어프렌티스> 등은 모델이나 기업 CEO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상금과 함께 재능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여기엔 조금 이상한 프로그램들도 포함될 수 있다. 도전자들에게 잠시 상류사회에 머무를 수 있는 티켓을 주는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워너비 힐튼>

<워너비 힐튼>

<워너비 힐튼>은 패리스와 니키 힐튼의 어머니 캐시가 진행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의 승자가 되면 20만달러와 가구가 딸린 맨해튼 고급 아파트의 1년 입주권, 힐튼 가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에티켓과 자선바자회 열기와 애완견 다루기를 배우는 도전자 열네명은 대부분 하층계급이고,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간절하게 힐튼이 되고 싶어한다(이 프로그램의 원제는 <I Want to be a Hilton>이다). 그러나 착하게 보이는 표정의 달인인 캐시가 영국에 왔을때 <타임스>가 의심했듯, 이 프로그램은 “<심플 라이프>를 향한 복수극일 수도 있다”. 이해와 연민의 화신처럼 나타난 패리스는 도전자들에게 자기 옷을 입혀 클럽으로 데리고 가지만, 그 어색하고 지루한 모습을 보면, 그녀가 <하우스 오브 왁스>에선 열심히 연기한 거였구나 싶어진다.

<켑트>도 비슷한 경우지만 남자만 도전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제리 홀은 모델이자 배우이고 믹 재거의 전처이기도 한데, 그는 아내인 제리 홀이 임신했을 때 다른 여자도 아이를 갖게 한 적이 있었다. 제리 홀은 그런 믹 재거를 욕하지 않았지만 그와 완전히 다른 남자를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녀가 <켑트>에서 찾는 남자는 언제나 복종하고 매너가 좋고 보기에도 좋은, 일종의 첩이다. 예의범절이 무엇인지 궁금해한 적도 없을 것 같은 이십대 초반 젊은이 열두명은 수십만달러의 용돈과 1년 동안의 상류사회 생활에 혹해 마흔여덟이나 된 제리 홀의 총애를 두고 다투지만, 그녀가 안 보인다 싶으면 젊고 예쁜 여인들에게 한눈을 팔기도 한다. <버라이어티>는 이 프로그램이 진지하게 보이지 않는다면서 “제리 홀은 있는 그대로 행동하기보다 <졸업> <선셋대로>의 여주인공을 연기하려고 하는 듯하다”고 평했다. 그녀는 실제로 연극 <졸업>에서 로빈슨 부인을 연기한 적이 있다.

사진제공 온스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