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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숨쉬는 생명체, <보리 세밀화 기획전-세밀화 작업실>
김유진 2006-05-19

얼스프로젝트 | 4월28일~5월14일

<가는돌고기>

자연과 동식물을 실제에 가깝게 묘사했다는 세밀화 작품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세련되거나 훌륭하게 가공된 이미지를 즐기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탓이다. 세밀화 작품을 1차적으로 접했을 때, 그저 그림이 묘사하고 있는 대상과 거의 완벽하게 똑같다는 감탄사를 보내면 이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란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이제호, 이원우, 이주용 등 14명의 세밀화 작가들의 작업을 전시하고 있는 <보리 세밀화 기획전>은 대중이 이미 다양한 이미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전시는 세밀화 작품을 단순히 전시장의 흰 벽에 거는 방법을 택하기보다는, 각기 다른 두 장소에서 ‘세밀화 작업실’(인사동 얼스프로젝트)과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세밀화 책마을’(서대문 자연사 박물관, 4월28일~5월28일)로 관람객에게 접근한다.

이중 ‘세밀화 작업실’은 말 그대로 작업실의 컨셉을 전시장에 옮겨놓은 전시다. 일단 전시 공간에는 그림을 위해 직접 키우고 있는 식물들과 작은 물고기들, 발품을 팔아 채집해서 구한 표본들, 각종 관찰도구와 채집도구, 그림에 사용하는 재료들과 도구들을 작업대에 늘어놓았고, 전시장 벽면에는 여느 전시회처럼 나란히 작품들을 걸어놓았다. 세밀화를 위한 과정은 공간 전체를 아우르고 결과물은 벽면에 배치한 것이다. 공간 전체가 입체적으로 하나의 작품이 되는 셈인데, 이는 전시장을 작업실로 꾸미는 작업을 벌인 프로젝트 그룹 ‘노네임 노샵’이 참여한 결과이기도 하다. 다른 전시인 ‘세밀화 책마을’에서는 라인 테이프 전문 그룹 ‘프로젝트 옆’의 작업을 통해 전시장 벽을 거대한 세밀화 책처럼 꾸미기도 했다.

이러한 기획은 꽤 효과적이어서 세밀화를 보고 “진짜 똑같다”라고 말하는 1차적 반응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여서 그렸을까” 하는 좀더 복합적인 사고를 실행시킨다. 한 식물을 발견하고 그려나가다가 계절이 바뀌어 모습이 바뀌면 다시 내년의 그 시점을 기다려야 한다든지, 동식물들의 표준을 그리는 것이 원칙이기에 같은 종의 다양한 개체들을 조사한 뒤, 꽃잎의 개수, 잎의 방향, 지느러미의 수, 털의 색깔 등을 확정짓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작업의 고난한 과정도 그제야 머리로 이해되는 것이다. 물론 국내 최초로 세밀화 도감을 펴냈고 15년 동안 작가들의 작품을 도감과 그림책으로 펴내온 보리출판사의 노고와 세밀화 작가들의 작품 자체의 가치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생명체와 온전히 만날 때를 기다려, 그들과 대화하듯 그림을 완성했다는 작품 앞에서 사진이 이 역할을 대체할 수 있느냐의 여부를 논한다는 것은 무의미하다. 제한된 모습과 짧은 순간을 내어준 사진 속의 생명체들과 ‘숨쉬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세밀화 속의 생명체들은 그 시작부터 다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