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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볼리비아와 21세기형 체 게바라

1966년 11월 체 게바라는 우루과이의 실업가로 변장하고 볼리비아 라파스로 들어갔다. 쿠바혁명 성공의 여세를 몰아 아프리카 콩고에서 한 차례 혁명을 실험했던 그가 세 번째 희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지역이 여기다.

“오늘부터 새로운 단계가 시작됐다. 밤이면 농장에 도착할 것이다. 여행은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다. 코차밤바에서 파충고와 나는 완벽하게 변장하고… 지프 2대로 이틀 내내 달렸다.”

게바라는 러시아혁명 49주년인 그해 11월7일부터 쓰기 시작한 이른바 <볼리비아 일기>에 잠입 당시의 사정을 그렇게 적어나갔다.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아메리카 대륙 전체를 혁명의 기운으로 끓어오르게 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는 이미 게릴라투쟁이 진행되고 있었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페루에서도 혁명가들이 활동에 들어가 있었다. 파라과이에서도 ‘투파마로스’라는 이름으로 나중에 좀더 유명해질 게릴라조직이 비밀리에 활동할 준비를 갖춰나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볼리비아인, 아르헨티나인, 브라질인, 페루인 등 여러 나라 출신의 혁명가 300여명이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비밀조직과 군사훈련에 돌입해 있었던 것이다.

게바라가 볼리비아를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전초기지로 삼은 데에는 무엇보다 지리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 볼리비아는 남미의 심장부에 자리잡고 있었다. 만일 볼리비아에서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다면 그 주변 페루, 브라질,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로 혁명의 불길을 그대로 확산시킬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혼란이 거듭되고, 세계에서 가장 큰 주석광산이 있는 것을 배경으로 광산노동자와 지식인 등 이른바 민주적 좌파세력이 강하다는 점도 고려했다. 라틴아메리카 혁명지도자들은 무장간섭과 괴뢰정권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에 대한 지배와 수탈을 강화하는 미국의 독점자본에 게릴라전쟁으로 맞서 최종승리를 거두려고 한 것이다. 게바라의 볼리비아 캠페인은 그렇게 시작됐다.

볼리비아. 라틴아메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 드는 이 나라가 체 게바라의 게릴라투쟁 이후 가장 극적으로 국제뉴스의 전면에 부상하고 있다. 이번에는 게릴라전이 아니다. 40년 뒤 볼리비아가 선택한 무기는 총이나 기관총이 아닌 에너지다. 바로 에너지산업의 국유화다. 새로 당선된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이달 초 천연가스와 유전의 국유화를 선언하고 이런 국유화에 저항하는 외국계 기업의 자산을 강제로 몰수하겠다고 경고했다. 볼리비아의 전격적인 국유화 선언은 세계시장을 또 한 차례 출렁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난 2년 동안 원유가격은 무려 4배로 치솟았고, 앞으로 예상되는 2가지 가운데 하나인 ‘단기적 급상승 뒤 가격조정’(Super-spike and Saturation)에 따르면 일시적으로 배럴당 100달러선을 넘는 것을 피할 수 없다고 하지 않는가?

볼리비아의 이번 ‘에너지 혁명’은 역사적인 측면에서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라틴아메리카의 인간다운 삶을 정치, 경제, 군사, 문화적으로 억압해온 미국의 ‘작용’에 대해 라틴아메리카 민중의 힘이 새로운 방향을 찾아 끝내 분출해 나오는 ‘반작용’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먼로주의 이후 라틴아메리카에서 독재정권과 반민주적 군부쿠데타를 지속적으로 지원하는가 하면 다국적기업의 이익 극대화에만 매진해온 미국식 세계화와 미국식 게임의 룰에 얻어맞기만 하던 민중이 이번에는 상대방의 뺨을 맞받아치고 나온 것이다. 부자들은 경비행기를 탄 채 자신의 사유지를 유유히 시찰하는데, 가난한 민중은 코카인의 원료인 코크나 씹으며 가난과 절망을 잠시나마 잊어보는 극단적인 양극화 상황을 언제까지나 용인한단 말인가?

역사적으로 미국과 다국적 기업은 이런 방향의 혁명적 민주정권에 대해 봉쇄정책과 쿠데타로 ‘처리’해왔다. 쿠바, 이란, 칠레, 도미니카, 인도네시아, 터키, 파키스탄, 그리스…. 그러나 이제는 게임의 룰이 바뀌고 있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을 제거하려던 쿠데타 기도는 밑으로부터 분출하는 피플파워 앞에서 후퇴해야 했다. 그렇다고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실험이 시장경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극단적 사회주의로 가지도 않을 태세다. 라틴아메리카의 민중권력과 미국의 독점자본은 좀더 고도화한 제2라운드의 격전장으로 진입해 들어가고 있다. 시장 메커니즘을 무대로 고도의 지적능력을 총체적으로 동원해야 하는 새로운 형태의 전쟁… 21세기의 체 게바라는 이제 총 대신 컴퓨터를, 게릴라전술 대신 첨단 금융기법을 숙달해야 하는 시대에 들어섰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