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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월드컵 신기루 유감
문석 2006-06-09

택시 속 라디오에선 월드컵 D조에 편성된 앙골라가 사면초가의 입장이라는 축구해설가의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앙골라 걱정할 때가 아니라고. 한국도….” 택시기사 아저씨는 갑자기 말을 뚝 끊은 채 흘끔 눈치를 봤다. “한국도 16강 진출을 걱정해야 할 입장이죠”라고 말을 받아주자 그는 안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죠? 아니 어떤 분들은 이런 얘기를 하면 화를 내요. 무슨 매국노 취급을 해요.” 푸념을 하듯 말하던 그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에이, 솔직히 난 월드컵 관심없어요.”

차에서 내리며 생각해보니 그 아저씨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 초읽기에 돌입했는데 나 또한 월드컵에 대한 기대감이나 흥분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축구를 싫어하지 않는다. 눈이 벌게라 새벽녘의 유럽 축구 생중계를 보고, 가끔씩 상암경기장에서 FC서울을 응원하며, 게임도 버전 4 때부터 접했던 위닝일레븐 시리즈만 플레이했으니, 축구는 오히려 좋아하는 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말로 이번 독일월드컵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는 것이다.

밤늦은 시각, 집에 돌아와서 TV를 켜면서 이 심드렁함의 정체를 깨닫게 됐다. 그곳에선 이미 월드컵보다 훨씬 치열하고 뜨거운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월드컵 공식 후원사가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CF는 축구를 소재로 삼고 있었고, 심야의 스포츠뉴스의 헤드라인은 국가대표팀의 별 새롭지 않은 뉴스가 장식하고 있었다. 광고와 프로그램 사이에는 각 방송사의 월드컵 중계방송을 홍보하는 자체 광고가 흘러나왔고, 케이블TV 스포츠채널들은 2002년 한국팀의 활약상을 다채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사정은 신문이나 인터넷, 길거리 홍보물도 마찬가지다. 눈과 귀를 어디로 향하든 월드컵이란 세 글자를 피하기란 도무지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건 이미 수개월 전부터의 일이다.

그렇다고 월드컵을 홍보 수단으로 이용하고, 또 거기에 호응하는 것을 비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광고와 뉴스 등에는 ‘하나가 되는’, ‘우리 모두 함께’, ‘염원을 담아’ 등등 빠지지 않는데, 그건 정말 싫다. 가장 심했던 건 한 통신회사의 광고다. 한 신생아가 태어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4천몇백몇십만명째 붉은 악마가 태어났다’는 카피를 달았던 이 광고는 무섭게까지 느껴졌다. 이 조지 오웰스러운 경우야 극단이라 하더라도 다른 광고들 역시 ‘이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1명의 열외도 없이 월드컵 응원전선에 총동원돼야 한다’는 사고가 깔려 있다. 아무리 숭고한 행위라 해도 모든 이에게 행할 것을 강요한다면 그건 명백한 폭력이다.

이렇게 말하곤 있지만, 결국 월드컵이 열리고 한국팀이 경기를 갖게 되면 나 또한 죽어라 괴성을 지를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덜 심각해지려 한다. 한국 축구팀의 승패를 국력 또는 국운과 연결짓지도 않을 것이고, 한국팀의 승리를 함께 응원하는 목소리를 놓고 ‘우리 국민이 통합됐다’고 뻥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가지 사족. 지방자치 선거가 월드컵 전에 치러지는 건 무척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월드컵 응원현장은 기업들의 홍보공세보다 더 추한 정치선전으로 난장판이 됐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