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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운명
2001-08-29

정윤수의 이창

● 읽을 만한 소설이 드물다는 엄살은 이제 엄연한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범타에 그치고 있는 주요 작가들의 근황도 그러하거니와 간혹 병살타까지 치고 있어서 소설의 매력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극단적인 궁금증까지 자아내는 형국이다.

그 증후인 바, 두눈을 부릅뜨게 만드는 평론이 최근 몇년 사이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로서 소설의 하향세를 확인할 수 있다. 최근의 문학평론이란 서정주 논쟁이나 문단권력의 해체, 때로는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왈가왈부로써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였거니와 사실 해석에 대한 욕망과 지지하고 싶은 ‘작가의 발견’을 경험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갈증이 더 심하고 또한 본질적이다. ‘창작과 비평’이 그 이름에 어울리는 작업을 최근 몇년 사이 조금도 해내지 못한 채 그나마 황석영의 <손님>을 맞아 잠깐의 리얼리즘 특수를 반색하는 정도이며 ‘문학과 사회’는 또한 그 회사명에 걸맞게 문학과 이 사회의 역동적 의사소통을 만끽시켜줄 만한 작품을 조금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민음사’는 종합출판으로 약진하면서 파이를 키우는 데 일조했지만 과거처럼 저잣거리의 흉흉한 소리를 작품으로서 총립시키는 데는 역부족인 상황, ‘문학동네’ 역시 그 번지수가 광장으로 향하기보다는 골목으로 편입되는 양상에 그치고 있다. 문단권력에 대한 논란이 최근의 권성우, 이명원에 의해 다시 제기되고 있으나 어쨌든 우리 문학의 중추신경인 이들 출판사의 약체 현상은 말할 것도 없이 창작의 부진이다. 문단이라는 기이한 활동의 동력원으로서 각 출판사가 일종의 복덕방 노릇을 했다는 얘기도 과거의 문단야사로 넘어갈 판국이다. 작가의 침체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얽히고 설켜서 유독 작가만의 태만을 지적해서는 곤란한 착종의 상황을 더불어 살펴봐야 하는 복잡한 주제가 되고 말았다.

조금 다른 관점에서 소설과 문학의 침체를 바라보는 시각도 있다. 참신한 만큼 몇 가지 보완을 해야 하는 관점인데, 그것은 바로 영화다. 역량있는 인재들이 모두들 영화쪽으로 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른바 ‘젊은 피 수혈’이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수긍할 만하다. 지난 세대의 문제적 소설가, 역량있는 문학평론가들은 대체로 20대 중반에 세상을 향해 포효했다. 어쩌면 그 밖에 달리 할 게 없었는지도 모른다. 홍기선, 이효인, 정성일, 이정하, 김홍준 등을 빼놓고 말한다면 그 당시 젊은 세대들은 모조리 문청이었다. 모두들 문학이란 그릇에 술을 양껏 퍼다가 온종일 마시고 그것을 토하고 싸질러대고 그 위에서 퍼질러 자다가 새벽 한기에 독감을 앓곤 했다. 그 밖에 달리 아무것도 없었다. 그중 몇명이 치고나가면 곧장 파란과 논쟁을 야기했는데 서른이 채 못 된 나이였다.

지금의 그 나이 세대는 대체로 문학과는 거리가 먼 동선으로 움직인다. 영상세대라는 말은 현상적으로 참이다.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드라마, CF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혹시 반지하 셋방이나 지하철에서 소설을 펴들고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끊임없이 우뇌만 돌린다. 연상작용의 마지막은 스크린이다.

이 상황을 두고 감각적이니 말초적이니 하는 말로 폄하하는 것은 수많은 영상물이 감각과 말초를 때로는 의지하되 그것을 창작의 뼈대로 삼거나 궁극의 목표로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한다면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이 못 된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등학교 곳곳에 문예반보다는 영상반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젊은 세대 대부분이 영상언어에 익숙해졌다는 현상일 뿐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훗날의 일로 미룰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점이 소설의 또다른 운명이다. 차라리 소설이, 문학이 이전처럼 모든 가치와 정서와 미학의 독과점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면 ‘요즘 젊은 것들…’ 하고 짐짓 체면치레라도 할 텐데 현실은 전혀 아니란 말씀이다. 장르의 우열이 없다는 고전 명제를 되새길 필요도 없이 영상의 언어가 문자의 언어보다 하등하다는 그 어떤 논리도 예증도 없는 형편이다. 차라리 요즘의 실상에서는 영상언어가 케케묵은 문자의 해독을 말갛게 씻고 있음을 종종 발견하는 상황이다. 좀더 상세한 텍스트 분석을 필요로 하지만, 예컨대 신경숙의 소설 <바이올렛>과 윤종찬 감독의 영화 <소름>을 과거처럼 문학/비문학, 문자/영상의 대립으로 과연 비교우위를 논할 수 있는지 의심스럽다.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소설가와 감독의 문제가 아니라 문자와 영상의 고전적 우열 규범이 허물어지고 있는 게 지금 우리의 문예 상황이다. 홀로 우주와 맞선 소설가의 창작의 고통 운운하지만 영화감독이 제작의 현장에서 나날이 부딪치는 매음의 고통에 비길 바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고래로 물었거니와 아무도 선험적 답을 내놓을 수는 없는 질문, 그렇다면 소설은 이제 사멸하는가? 문학이란 이름으로 떨쳤던 그 높은 위세와 영광의 나날은 정녕 ‘추억은 방울방울’ 한 세대 전의 영광으로 전락하는가? 글쎄… 아무리 새벽 한기가 문득 가을을 재촉하고는 있지만….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