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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스포일러투성이
권리(소설가) 2006-06-16

모든 현상은 ‘힌트’로 시작된다. 뱃살이 늘어진다는 것은 이제 곧 볼살이 찔 것이라는 힌트이고, 첫 문장이 안 풀린다는 것은 그 글을 쓰는 내내 개고생을 할 것이라는 힌트가 된다. 물론 좋은 결과를 암시하는 힌트들도 있지만, ‘결국 넌 망하게 되어 있어~’라고 ‘망할송’을 부르며 우리를 괴롭히는 나쁜 힌트들도 있다. 그리고 늘 머릿속의 암흑파와 싸우고 있는 내게 세상 힌트의 대략 87%는 나쁜 힌트로 보인다. 나는 그걸 ‘스포일러’라고 부른다.

많은 이들이 <유주얼 서스펙트>나 <식스 센스>의 스포일러에 버럭 화를 낸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은 인생의 스포일러를 듣고도 샤방샤방한 미소를 날리며 말한다. 그딴 거 안 믿어. 그런 광경을 목격할 수 있는 대표적인 동네가 점집이다. 난 한 사주 카페에서 좌절을 담뿍 안겨주는 많은 스포일러들과 접선했었다.

-의대에 가면 성공하겠군. (죄송합니다, 이미 사회학과를 나와버려서.)

-서른넷쯤 결혼하겠구먼. 아냐, 서른여섯이군. (네네, 요즘 다들 늦게 결혼하는 게 유행이래요 --+)

-초년에 고생이 심했어. (아휴, 그런 걸 알아주시다니, 고마우셔라.) 근데 이십대도 방황의 연속이겠구먼. 소질있어 뵈는데 이쪽에 자리 펴는 거 어때? (왜 이러세요? 안 그러셨잖아욧!)

대충 이런 식이다. 난 그 카페에 붙은 ‘사주 경시대회 1등 수상자의 집’이란 간판을 찹쌀떡같이 믿었을 뿐이다. 하지만 카페를 나올 땐, 마치 비가 올 것 같아서 우산 쓰고 밖에 나갔다가 벼락 맞은 기분이었다. 인생에 방어란 없다. 무수한 스포일러를 피할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굿, 부적, 엿 따위는 인간이 갖고 있는 불안의 표징일 뿐 해결의 수단은 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가 어디 자기 어머니와 관계를 맺을 운명임을 몰라서 운명의 쓴맛을 맛보았겠는가. 알고도 피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스포일러의 덫이다.

현재 세계는 온갖 스포일러들이 경쟁을 벌이고 있다. 그중 가장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가 미쳐가고 있다’는 스포일러는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다. 봄과 여름의 경계가 사라지고 해수면의 높이는 점점 높아지고 있으며 지진, 해일, 홍수 등은 매년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간다. 하지만 천재(天災)들은 이미 한물간 스포일러들이다. 천재보다 더 확실하게 인류가 멸망할 것을 보여주는 스포일러는 인재(人災)다. 이라크, 동티모르, 네팔 등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과 민간인 학살 현장이 바로 스포일러들의 놀이터다. 하지만 결정권을 지닌 자들은 대체로 귀가 두껍다. 저 옛날 소포클레스도 ‘전쟁은 언제나 악인보다는 선량한 사람만을 학살한다’고 결정적인 스포일러를 날려주셨건만 그들의 귀에 남의 말은 귀신 도시락 까먹는 소리 정도로밖에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그들은 전쟁 시나리오의 줄거리와 아무 상관없지만 뭔가 있어 보이는 미끼들을 맥거핀 방식으로 이곳저곳에 흩뿌려놓았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낚시질에 속았다. 하지만 사람들이 스포일러에 대해 한마디 할라치면 그들은 ‘어버버버버’하면서 일부러 안 들리는 척까지 한다. 왜일까. 혹시 뻔한 결말임이 들통난 뒤, 자신들의 얕은 수법이 ‘@@씨의 굴욕, OTL’이란 제목으로 편집되어서 어느 유머 게시판을 떠돌게 될 것이 두려운 것일까.

요새는 평택과 파주의 조용한 농촌에서도 스포일러들이 들려온다. 50개의 별들에 충성을 약속한 사람들이 총기까지 소지하고 다닌단다. 1막에 총이 관객에게 보였으면 3막에서는 꼭 발사해야 한다는 체호프의 말이 공포로 전환돼온다. 그들은 약한 자가 당하는 게 아니라, 당하는 자가 약한 것이라는 주제의식을 셔레이드 기법으로 보여주려나보다. 하지만 그들을 파견한 국가의 전쟁은 이미 4막을 향해 가고 있고, 스포일러는 이미 퍼질 대로 퍼졌으며, 우린 마음속으로 진범에게 체포영장까지 보냈다. 그럼에도 전쟁이 계속되는 건 혹시 허를 치는 반전(反轉)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인가? 하지만 우린 기억한다. 반전에 집착하다 욕을 바스켓으로 처먹은 할리우드산 영화들을. 유아적 발상은 이제 노 땡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