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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F로 배우를 엿보다 [3]

CF가 만든 배우의 현재와 미래

스타 탄생은 때로 한편의 영화, 한편의 드라마, 한장의 음반에서 이루어지지만, 최근에는 CF가 스타 탄생의 산실이 되고 있다. 극중 배역은 스타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중요한 기제이고 보통 광고는 이런 스타의 이미지를 차용하지만, 역으로 광고가 스타의 이미지 형성에 기여하고 무명의 연기자를 일약 스타도 만들기도 한다.

욘사마의 미소, 코카콜라의 미소

일본 열도를 끓어오르게 한 욘사마 배용준의 낭만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그의 부드러운 미소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오래전 광고에서 시작된 것이다. <겨울연가>를 제외하고 배용준이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여준 드라마는 거의 없다. 이전 드라마에서의 배역은 대체로 반항적이거나 복수심에 불타거나 권위와 체계를 거부하는 인물이었다. 배용준의 부드러운 이미지는 1996년 그가 모델로 기용됐던 과일나라 CF와 LG그룹의 기업광고에서 만들어졌다. 워낙 광고는 행복하고 살 만한 세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이 광고에서 보여준 배용준의 미소는 그야말로 백만불짜리 미소였다. 새소리와 아이들 웃음소리가 넘치는 시골길, 지프를 탄 배용준이 LG로고가 새겨진 운동모자를 쓰고 아이들과 함께 ‘사랑해요. 사랑해요 LG’를 합창하는 이 CF는 천진난만한 아이들, 귀에 착 붙는 CM송으로 그의 미소를 더욱 따뜻하고 부드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광고모델이 우리에게 스타의 이미지를 주조하는 기제로 떠올랐을까? 한국 광고사를 되짚어보면 1920년대 광고모델로 무용가 최승희가 등장한다. 이미 근대 초기에도 대중스타, 셀레브리티가 광고모델로 기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 광고가 명실공히 체계를 잡아가고 스타와 광고가 상승효과를 일으키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다.

시인이자 영화감독인 유하는 그의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톡 쏘는 맛처럼 떠오르는 여자’를 예찬한다. 바로 코카콜라 CF의 모델, 심혜진이다. 시인은 그녀의 미소를 ‘폐수 위에 핀 연꽃’으로 비유했다. 1988년 코카콜라 슬로건이 ‘난 느껴요’(I feel Coke)로 바뀌면서 등장한 당시 21살의 무명모델 심혜진은 해변이나 운동장 등이 등장하던 기존 코카콜라 CF의 분위기를 확 바꿨다. 도회적이고 세련된 정장을 입고 시원하게 웃는 그녀는 팔꿈치로 장난스럽게 동료 남성의 얼굴을 치기도 하고, 정장 차림으로 야구장에서 홈런을 날리는 모습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영상을 선보였다. 광고에서 활동적이고 건강한 미소를 지닌 여성 모델이 등장한 것은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순식간에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 꽃피고 여권이 신장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같은 시기 삼성전자 CF에서는 ‘남편사랑은 여자하기 나름이에요’라고 애교스럽게 말하는 새댁이 있었으니. 이 새댁이야말로 우리나라 광고역사에 기록될 만한 CF스타다.

사랑받는 아내와 산소 같은 여자

최진실이 등장한 1988년 즈음,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우리의 소비문화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소비의 폭발적인 성장세와 함께 바야흐로 혁명의 시대는 욕망의 시대로 접어들어가게 된다. 수출역군이었던 가전 3사들은 내수시장에 전력을 다했고 광고는 전자제품의 경합장이었다. 특히 백색가전이라 불리는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 비디오, 전자레인지 등 생활용품들이 대중화하기 시작했다. 혼수가전의 패권을 장악한 삼성전자는 “남편 귀가시간은 여자하기 나름이에요”, “남편사랑은 가끔 확인해봐야 해요” 등의 가부장제 냄새가 물씬 나는 카피와 더불어 최진실의 애교있는 모습으로 소비자를 공략했고 모델 최진실은 일약 스타가 되었다. 최진실은 당시까지 공식화돼왔던 광고모델과 탤런트 혹은 영화배우의 관계를 뒤집어놓았다. 탤런트나 영화배우로 성공하고 지명도를 얻어야 가능했던 광고모델은 더이상 스타의 부업거리가 아니라 데뷔무대가 되었다. 상업광고의 영향력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실질적으로 여성의 이미지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것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들어서이다. 1991년 태평양의 ‘마몽드’는 이영애라는 최고의 CF스타를 배출했다. ‘산소 같은 여자’라는 슬로건으로 내세운 이 CF는 ‘세상은 지금 나를 필요로 한다’는 카피와 함께 운동과 사격으로 자신을 단련하고 사건현장에서는 남자들을 지휘하는 여형사의 모습이 등장한다. 캠페인 초기에 등장한 ‘결혼이 목표는 아니다’, ‘나의 삶은 나의 것’, ‘성취는 남자의 것만은 아니다’ 등의 카피에서 드러나듯이 20대 여성의 가치관 변화가 담겨 있다. 이후 그녀는 영화 <선물> <공동경비구역 JSA>와 드라마 <대장금>의 성공으로 아시아의 스타가 되었고, ‘CF의 여왕’으로 등극했다. 말 그대로 CF를 종횡무진했기에 ‘이영애의 하루’라는 인터넷 유머가 등장할 정도였다.

이영애에 이어 CF여왕의 지존에 도전하는 테크노 요정이 혜성같이 등장했으니, 1999년 말 삼성 마이젯 프린터 광고에서 섹시한 테크노댄스를 선보인 10대 소녀 전지현이다. 그녀는 춤 하나로 스타덤에 올랐다. 업계에서는 ‘전지현이 광고하면 상품이 뜬다’는 전지현 효과가 거론될 정도로 이후 그녀가 모델로 등장한 광고 상품마다 시장점유율이 호조를 보였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는 청순, 발랄한 이런 광고에서의 이미지가 확대재생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영화의 부침과 달리 ‘CF여왕’ 전지현의 입지는 현재 그 누구보다 탄탄하다.

20년을 함께한 CF모델, 키치로 거듭난 배우

‘파블로프의 개’로 잘 알려진 조건반응이론은 광고의 세계에서도 통용된다. 즉 낯선 상품을 어떤 익숙한 이미지와 결합시켰을 때 자연스럽게 그 이미지가 광고제품에 투영된다는 것. 천연조미료라는 새로운 상품으로 런칭한 다시다와 모델 김혜자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드라마 <전원일기>를 통해 전통적이고 수더분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얻고 있던 김혜자는 다시다 CF에서 도시에 사는 현대인에게 고향의 맛, 그리운 어머니의 손맛을 일깨웠다. 다시다의 캠페인이 지속되는 20여년간 <전원일기>도 장수하고 있었고 덕분에 이 드라마와 광고는 서로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김혜자와 더불어 20여년간 장기적인 광고캠페인을 벌여온 또 다른 모델은 맥스웰하우스의 안성기다. 동서식품 맥스웰하우스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커피 광고는 전통적으로 부드럽고 사색적인 망중한을 그려왔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거실 소파에 앉은 부인에게 커피를 건네주는 자상한 남편 혹은 유럽 어느 관광지의 노천카페에서 아내와 이마를 맞대고 다정하게 웃는 남편 등 영화배우 안성기는 자상하고 편안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하는 동안 점점 맥스웰커피 이미지는 안성기를 닯아가고 안성기는 커피 이미지를 닮아가고 있다.

김수미 장라면 CF

광고의 세계는 섹시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의 전유물일까? 이전에는 그랬다. 그러나 전원주를 모델로 기용한 1998년 데이콤의 ‘터치터치002’ CF가 등장하면서 그 공식이 깨졌다. 호들갑스러운 웃음소리로 극에서 감초 역을 해왔던 전원주는 이 CF에서 만화영화 <짱가>의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지붕 위를 달리거나 공항에서 텀블링하는 기묘한 이미지로 등장한다. 부조화의 조화가 독창성을 낳았던 키치 광고다. 이 광고로 인해 전원주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고, 제2의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중견배우가 CF모델로 대거 등장하게 된 것도 이 광고가 계기가 되었다. 원로배우 신구는 롯데리아 크랩버거 CF에 등장해 “니들이 게맛을 알어?”라는 독특한 뉘앙스의 대사로 최고의 인기를 얻었고, 김수미 역시 <대장금>을 패러디한 한국야쿠르트 ‘장라면 CF’로 인기를 얻고 있다. 식품 광고와 김수미는 이미 잘 어울리는 이미지로 변해 있었는데, 이는 그 유명한 홈쇼핑 채널의 ‘김수미 꽃게장’ 덕분이다. 어쨌든 광고전략의 발상의 전환은 모델의 전환을 가져왔고, 모델로 등장한 배우들에게 인생의 전환을 가져왔다.

이렇듯 광고와 스타 이미지는 서로 공모의 관계에 있다. 스타가 매스미디어와 스타시스템에 의해 만들어진다면, 광고는 그 시스템을 움직이는 자본의 동력이면서 스스로도 막강한 텍스트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사실 영화를 통한 이미지건 CF를 통한 이미지건 그 이미지는 스타 개인의 본질과는 무관한 가상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가상의 이미지에 대중은 물론 스타 자신도 포획되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