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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흡연유발하는 세상
이다혜 2006-06-23

반년 동안 볼 섹스신을 칸영화제 시작, 이틀 만에 다 봤다. 주인공들은 만나면 거두절미하고 섹스를 하곤 했다. ‘거두절미’라는 표현은 물론 약간의 뻥이 섞인 것이지만, 어쨌건 빈도 면에서나 강도 면에서나 정말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미처 못 봤지만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는 영화 한편으로 1년치 섹스신은 다 보여준다고들 했다. 그런 상황이니 섹스신을 보는 것만으로 인물들간의 관계와 상황 전개를 대략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아, 이것이야말로 심도깊은 예술세계로의 진입을 알리는 신호탄인가!). 로우예의 <서머 팰리스>에서 중국 내 정치상황의 변화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거칠게 삽입된(원래 이 말이 이렇게 야한 표현은 아니었다, 맹세한다) 베를린 붕괴나 천안문 시위 장면 등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는 것보다 여주인공의 성적 분방함이 도를 더해가는 것을, 영화가 보여주는 대로 ‘느끼면’ 된다. 교르기 팔피의 <박제> 첫 에피소드에서, 남자주인공이 놓인 극한 긴장상황을 이해하게 해주는 대목은 빈번한 상사의 호출보다 오두막에 난 판자 구멍이라도 그저 애달프게 자위 장소로 이용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결국 그는 그만… 소중한 곳을 수탉에게…).

섹스신보다 더 자주 등장하는 장면은 흡연신이다. 유럽영화가 많아서인지, 전쟁영화가 많아서인지는 모르겠으나 역할의 경중을 떠나 모든 사람들이 단체로 담배 피우는 장면을 수시로 볼 수 있다. 사람을 만나 대화를 시작하면서 한대 피워물고, 섹스가 끝나도 한대 피워물고, 혼자 우울해도 한대 피워물고, 배경 속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한대씩 피워물고. 프랑스는 선진국 중 가장 흡연에 너그러워서, 극장을 벗어나도 담배 피우는 사람들을 시시때때로 볼 수 있다. 공항이나 극장 내 ‘금연’ 표지판 아래서 담배를 피우는 외국 사람들의 자유로운 영혼은 정말 소심한 아시아 여성에게는 진귀한 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유럽은 담뱃값이 비싼 탓에 상영관 밖에서 담배를 피우다보면 담배 한 개비만 달라는 사람들과 마주치는 일도 흔하다. 동양 사람들이 특히 담배 인심이 후하다고 생각하는지 담배를 구걸하는 사람을 적어도 하루에 한명은 만날 수 있었다. 야외상영관이 마련된 팔레 드 페스티벌 근처의 해변에서도 흡연 열기는 이어져, 재떨이 하나 없이도 맑은 칸 밤 공기를 향해 담배연기를 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상황을 나 역시 자유롭게 활용하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겠다.

하긴 영화 상영을 기다리며 줄을 길게 서 있는 사람들 사이로 당당하게 새치기하는 외국 기자들을 보고 있으면 속이 타들어가 절로 담배를 피워물게 된다. 칸영화제에서 받은 기자 아이디(목줄에 걸고 다니는)를 잃어버린 뒤 재발급 신청을 하러 갔더니 “팔레 드 페스티벌이 습격당할 수도 있으니 그냥 재발급은 곤란하다. (20분 거리에 있는)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하고 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담배부터 댕겼던 것도 영화에서 매일 담배 피우는 장면을 본 학습효과가 아닐까, 라고 혼자 우울하게 생각했다.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하겠다고 했더니 담당 경찰이 “영화제 아이디 분실을 경찰서에 신고하는 게 말이 되냐”며 어처구니없다는 듯 쳐다보았을 때 담배부터 간절해졌던 것 역시 그렇다. 아차, 그런데… 영화 덕에 담배는 늘었는데 섹스는 왜 안 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