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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음악 <A.I.>
2001-08-30

할리우드에 포박당한 비극

스탠리 큐브릭이 만들었다면 출구가 없는 비극적 신화의 구조를 띠었을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의 손에 의해 선형적인 성배 이야기로 바뀌었다. 스필버그의 내러티브는 순차적이고 직선적이다. 모험의 이야기, 꿈의 성취에 관한 이야기들; 그래서 본질적으로 성배 찾기의 구조. 이 영화에서 그 연쇄들은 미래의 시간 너머로 길게 늘여뜨려진다. 암울하고 비극적인 미래에 대한 <토탈 리콜>식의 전망이 어느 순간 희망 찾기로 바뀌고 거기서부터 할리우드가 전략적으로 개입한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 역시 순차적이다. 스티브 라이히의 미니멀리즘을 대중적으로 포장한 리듬 위에 존 윌리엄스 특유의 탄탄한 브라스와 스트링을 얹은 테마음악은 충분히 암시적이다. 테마의 비극성은 한 엄마의 모성애가 아들 로봇과의 사랑을 부정하고 그 부정으로 인해 아들 로봇의 성배 추구적인 꿈(사람이 되고 싶다는)이 생성되는 미래식 가정드라마가 펼쳐지는 첫 시퀀스의 내면성으로 이어진다. 말러의 어느 교향곡 2악장을 연상시키는 그 음악은, 화음을 복잡하게 쓰지 않는 대신 멜로디 자체가 복잡한 화성을 품고 있도록 만들었다. 이런 데선 내면적이어야 하므로 웅장해선 안 되는데, 화음을 복잡하게 쓰면 웅장해질 소지가 있다. 그래서 이런 선택을 한 듯하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이 대목이 훌륭한 내면 드라마가 되는 데 적절히 기여하고 있다.

다음 시퀀스는 로봇 지골로의 그것이다. 거기서는 마치 새로운 영화가 시작하듯 새로운 분위기의 음악이 흐른다. 로봇 지골로의 손가락에서 나오는 스탠더드풍의 달콤한 옛날 노래가 분위기를 주도한다. 그 분위기는 미등록 로봇을 추적하는 달모양의 감시선이 떠오르며 다시 비극적으로 변화한다. 이때에는 좀더 테크노적인 성향이 가미된다. 로마의 검투사 경기와 록콘서트의 분위기와 WWF 레슬링 시합을 섞어놓은 듯한 폐기물 축제장면에서는 당연하다는 듯 헤비메탈풍의 음악이 배경에 흐른다. 이 대목은 좀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여기 나오는 헤비메탈은 너무 평범하고 상상력이 부족하다. 일부러 그런 음악을 채택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스필버그가 이런 시니컬한 분위기에 조금 약하다는 생각이 들도록 한다.

미래 홍등가인 ‘루즈 시티’의 쾌활함과 닥터 노우의 코믹함을 거쳐 음악은 갈수록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결말을 암시하기 시작한다. 피노키오에 등장하는 블루 페에리가 이 로봇 소년의 ‘성모 마리아’가 되고 그녀를 찾아가는 모험의 길이 노골적으로 드러날수록 그렇게 된다. 그러다가 급기야 끝부분에 이르면 아, 이 영화가 결국 <ET>가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밝고 순진무구한 톤으로 변한다. 거기서는 사실 어떠한 비극성도 발견하기 힘들어진다. 시간이 2000년을 훌쩍 더 뛰어넘어 인류의 멸종 이후와 로봇의 세계지배를 이야기하는 대목에서는 거의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존 윌리엄스의 음악은 결말부분에서 이르러 단순한 뉴에이지 피아노 소품을 연상시킬 정도로 순박해진다. 어? 처음의 비극성은 어디 갔지?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보자. 영화가 시작할 때, 음악은 마치 미래의 이야기가 암울한 집안 내력처럼 관객의 심리 속에 파고들도록 도와주었다. 사실상 그 부분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집중력 있는 대목이었다. 그런데 초반의 비극성이 끝까지 유지되지 않은 이유는 뭘까? 딱히 비극적일 필요가 있냐고? 꼭 그렇진 않지. 그러나 이 대목에서 할리우드가 전략적으로 개입했다는 건 자명하다. 내가 보기에 스필버그는 균형점을 찾다가 끝에 가서 작가정신을 잃고 흔들린다. 거기에 맞추다보니 존 윌리엄스의 음악이 달콤한 팝으로 바뀐 것이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