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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의 룰은 내가 만든다 `김지운 감독`
2001-08-30

“나는 나”라는 광고 문구가 대표하듯 90년대 이후 대두된 문화적 감성의 출발점이자 귀결점은 개인이었다. 거대 담론의 공백을 개인 스스로 채우라는 듯 `일탈' `질주' 같은 단어가 대중문화계를 수놓았다. 그러나 뚝심없는 위반은 공허하기 쉽다. 이런 점에서 오래전부터 위반의 감성을 체질화한 김지운 감독(37)의 경우는 흥미롭고 의미심장하다. 그가 가꿔온 자기만의 세계가 개성있고 완성도 높은 영화의 원동력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가족> <반칙왕> <커밍아웃>은 아웃사이더 캐릭터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독특한 재미와 웃음을 안겨주는 작품들이다. “따지고 보면 늘 장르 실험을 해왔다”는 감독의 말처럼, `공포+코미디' `액션+코미디' 등으로 장르와 캐릭터를 자기 취향껏 요리해왔고 흥행에도 성공했다.

30일 촬영에 들어간 중편 <메모리스>(김혜수, 정보석 주연) 역시 `김지운표'다. 어둠이 아닌 밝은 대낮을 배경으로 찍는 미스터리 공포물로, 이런 낯선 방식 때문에 감독 자신은 `쿨 호러'란 이름을 붙였다. 천커신(진가신), 논지 니미부트르 등 현재 홍콩과 타이를 대표하는 감독이 만드는 작품들과 묶어 아시아 전역에 동시개봉할 옴니버스 영화다. 끊임없이 새 영역을 개척해가는 김지운 감독의 힘을 알아보기 위해 그의 과거와 현재로 들어가본다.

◈학창시절에서 군대로 이어진 언더그라운드의 삶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극장을 드나들었다. 그곳에서 사회와 인간을 배웠다. 학교가 나에게 해준 게 있을까? 고등학교 때 언더그라운드 문화를 이룬 선배·동료들과 어울려 일종의 히피즘에 푹 빠졌다. 극단 76의 연출가 기국서 선배, 친구인 기타리스트 이병우씨 등이었다. 당시 우리를 지배했던 건 “다 가짜다”라는 비타협적 정서였다. 정당한 주류가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고 본 거다. 이런 치기 때문에 83년 대학에 들어가 교련 수업에 줄곧 빠졌다. 그랬더니 1년 뒤에 군대에서 부르더라. 군 생활 초반에 제3세계 정치경제학 책을 보다 다른 소대원에게 빌려줬는데 보안검열에 걸렸다. 대대장이 “휴전선 넘어갈 놈”이라고 대기병 생활을 시켰고, 그때부터 치고 박고 싸우기 시작하면서 30개월 군생활 동안 한 군데에서 석달 이상 머물지 못했다. 제대하고 보니 대학에서 제적됐더라. 학교에 대한 미련을 이때 접었다.

◈백수 10년의 힘

94년까지 줄곧 백수였다. 지금보다 더 재밌었던 시절이었다. 불투명한 미래와 소속감없는 생활이 괴롭지 않았냐고?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힘이 적어도 5년은 버티게 했다. 아르바이트 해서 5개월 동안 유럽으로 무전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파리에서 두달간 머물며 100여편의 영화를 봤다. 운좋게도 영화사를 정리하는 걸작들을 틀어줄 때였다. 세상에는 훌륭한 영화와 천재가 아주 많다는 걸 알았다.

지금 비주류로 살고 있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비주류 정서는 내가 속물화하는 걸 잡아준다. 어렸을 때부터 남과 다른 걸 생각할 때 만족스러웠고, 재미를 느꼈던 것 같다. 이런 아웃사이더로서의 성장이 지금의 작업에 영향을 끼친다. 내 감성을 믿게 된 계기는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씨의 말이었다.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없으면 자기가 게임의 룰을 만들면 된다.”

◈결혼, 돈, 술에 무심한 남자

결혼은 여자를 좋아해서 못하는 거다, 하하. 10대 후반에 내가 좋아하는 걸 정말 하려면 모든 걸 다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워야 한다는 생각에 일찌감치 결혼은 안하기로 결심했다. 나중에 친구 같은 사람 만나 그냥 살 생각은 있다. 재테크 개념도 없다. 돈이 있으면 쓰는 건가보다 하고 그냥 쓴다. 23평 아파트가 있지만, 재산 1호는 디브이디(DVD)다. 술은 폭탄주 석잔을 연속으로 먹어도 취하지 않지만 안먹는다. 술먹고 쉽게 확 풀어지는 거, 감상적으로 변하는 게 싫다.

◈로맨틱코미디가 싫은 코믹물 감독

뭐든지 보는 게 좋다. 서울 명동이나 교보문고 같은, 나를 모르는 사람들 틈에서 하염없이 사람들을 지켜보는 게 재밌다. 그런데 로맨틱코미디 영화는 딱 질색이다. 도대체 긴장감이 없다. 책도 소설보다 사회과학쪽이 좋다. 사회과학책은 한 문장 한 문장이 테제여서 긴장하고 읽게 되지만, 소설은, 활자가 묘사하는 속도보다 머리 속에 그려지는 그림이 더 빨라 금방 지루해진다.

◈일상의 호러, 그리고 새 공포영화 <메모리스>

자꾸 공포물을 만드는 것도 일종의 긴장감 같은 건데, 문학평론가 김현씨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타자가 동일자가 되는 게 사랑이고, 동일자가 타자화되는 게 공포다.” 내 영화의 주인공들은 늘 주류 질서나 이데올로기에서 떨어져나온 타자화한 사람들이다. <조용한 가족>은 냉소의 분위기로 끝까지 몰고 갔고, 삶에 대한 공포를 담은 <반칙왕>은 개인의 극복 노력을 담았다. <커밍 아웃>에서는 타자와의 동일화를 시도했다. 새 영화 <메모리스>에서 처음으로 유머를 걷어낸다. 신도시를 배경으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여자가 기억을 되찾아가면서 예기치 못한 공포를 겪게 되는 이야기다. 어렸을 때 뛰어놀던 동네를 가보면 낯선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저기 뭐가 있었지' 하게 되는데 이건 기억이 없어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는 공간이 변해가면서 기억들까지 훼손되는 게 공포가 아닐까. 또 현실적으로 신도시의 난개발도, 신도시 자체도 공포스럽다. 물론 메시지보다 현실에서 받은 인상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표현할까를 고민한다. 난 현실과 팬터지의 미묘한 경계에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성욱 기자 lewoo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