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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인생 안으로 부정합이 걸어들어올 때
권리(소설가) 2006-06-30

얼마 전 대학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었다. 몇년 만에 본 친구들의 입에서 먼지 쌓인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다섯 친구 중 셋 정도 결혼한 그룹의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다보면 어느 틈에 유부녀 대 무부녀로 갈리게 된다. 유부녀가 다수일 경우, 대화의 주도권은 그녀들이 선취한다. 반지 하나를 보고도 ‘예쁘네?’ 정도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녀들은 뭐든 구체적이다. 플라티늄이네, 백금이네, 하던 반지 이야기를 드리블해가던 그녀들은 마침내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 혹은 남편 이야기로 골인한다. 오, 많은 시간이 흘렀어. 무부녀들은 침묵에 빠진 채 유부녀들과의 간격을 시간으로 환산해 재고 있다.

예전에는 그런 수다들이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누가 어디서 옷을 30% 할인해서 샀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요리를 싸게 먹는 방법이든, 내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일상적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은 자극을 주지 못했다. 늘 식탁 한구석을 차지하는 김치처럼 식상했으니까. 스무살 무렵, 내게는 브라질의 수비벽만큼이나 견고한 신념 같은 게 있었다. 살이 찌면 지력(知力)이 줄어들어, 명품을 들고 다니는 애들은 다 머리가 비었어, 서정시는 감정의 낭비이고 사치야, 축구는 인생에 별 도움이 안 돼, 라는 식 말이다. 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벌인 일들도 많았다. 그 시기, 나는 자기 세계가 강한 친구들과 만나려 애썼다. 자신만의 세계가 강한 사람에게는 배울 만한 어떤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착각은 아니었지만 100% 진실도 아니었다.

세계가 강한 사람들은 저마다 독성 강한 가시를 갖고 있다. 거리를 두고 보면 그 카리스마에 감탄하게 되지만, 거리를 없애고 보면 그 결벽증에 상처 입게 된다. 지금은? 내 주위에는 그런 친구들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환상처럼 사라져버렸다. 이제 의식주를 챙기는 것은 내게 중요한 일이 되었고, 살찐 것이나 명품을 들고 다니는 것이 지력이나 머리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며, 밤마다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시들에 빠져들며, 마감이 임박한 오늘밤에는 브라질과 크로아티아의 문자 중계 화면을 눈으로 따라가기 바쁘다. 이것이 과연 내가 알고 있던 나인가?

지금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중2 때였던가. 부정합이란 것에 대해 배운 것이. 사전을 찾아보기로 한다. ‘상하로 겹쳐진 두 지층의 형성 시기 사이에 커다란 시간 간격이 있는 일.’ 내 인생 안으로 부정합이 걸어들어온 것일까? 스무살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놓여 있던 고리가 끊긴 느낌이다. 스무살의 나는 작고 초라했지만, 지금은 만지고 느끼고 맛볼 수 없는 열정과 용기 같은 게 있었다. 무모했고 또 그만큼 치열했다. 그때의 나를 도로 찾아올 순 없는 것일까? 나는 부정합이 되어버린 기억의 단층들을 접합시키려 애써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단층들의 접합 부분은 뭉툭한 비명을 지르며 서로 멀어질 뿐이었다.

시간은 힘이 세다. 기억을 단절시키기도 하고 추억을 없애기도 하며 마음을 공허하게 만들기도 한다. 시간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힘은 마음의 ‘켜’를 늘려준다는 것일 것이다. 켜는 ‘포개어놓은 물건의 하나하나의 층’이란 뜻이다.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섬세하고 무언가 풍부해지는 반면, 또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마도 이 켜의 무게 때문인 듯싶다. 켜들은 나이가 들수록 방금 케라시스한 머리칼처럼 한올 한올 마음속에서 살아난다. 켜의 수가 늘어날 때, 우린 우리 안의 부정합과 만난다. 용인할 수 없었던 것을 용인하게 되고 아프지 않았던 것들이 아파온다. 이런 단절감 때문에 혼란이 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언젠간 그것 역시 나 자신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난 내 안에 새로 이사온 나를 외면하거나 멀리 쫓아내지 않을 생각이다. 따뜻하게 안아주고 위로해줄 것이다. 설령 서른이나 마흔 따위의 숫자상으로 구분 지을 수 없는 그 시간에 그가 날 떠날지라도, 난 과거의 내가 떠난 자리에 남은 켜들을 쓰다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