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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백문이 불여일견

먼저 차이밍량 감독님의 진정성을 의심한 것을 사과한다. 예전에 차이밍량의 <구멍>을 보면서, ‘저건 좀 오버하는 거 아냐’ 했었다. 영화 속 타이베이에는 ‘주야장천’ 비가 내렸다. 아니 우울한 정서를 표현하고 싶은 감독님의 의도는 알겠는데, 좀 심하게 비를 뿌려대시는 것 아닌가? 살짝 화가 나려 했다. 또 건물들은 왜 이리 우중충한지, ‘설정’이 좀 심하다 싶었다. 아니 대만이 국민소득으로 따지면 한국 보다 못살진 않는 것으로 사료되는데, 왜 이리 오버하십니까? 어디 <구멍>뿐인가. 차이밍량의 다른 영화 속 타이베이도 심심하면 비에 젖었고, 건물은 대개 우중충했다. 작심하고 차이밍량의 ‘뻥’을 확인하려는 목적은 아니고, 어쩌다 취재 때문에 타이베이에 열흘가량 머물 일이 생겼다. 아마도 6월께의 초여름으로 기억되는데, 정말로 타이베이 거리에는 추적추적 줄기차게 비가 내렸다. 비내리는 거리의 건물들도 정말로 우울한 회색빛이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외환보유고를 자랑했던 대만의 우중충한 건물들을 보면서, 중국분들은 정말로 치장에 신경 쓰지 않는구나, 정말로 대만을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정거장쯤으로 여기나보다, 생각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죄했다. 감독님의 진정성을 의심해 우산을 준비하지 않은 자신을 탓하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원래는 분쟁지역의 참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목적이었다. 지난해 운좋게 몇명의 기자들과 함께 발칸반도의 분쟁지역을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알바니아의 수도 티라나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코소보의 중심도시 프리슈티나에 도착했다. 어스름이 깔린 저녁이었다. 곧바로 일행을 기다리던 버스가 숙소로 향했다. 코소보는 두어해 전까지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눴던 곳이다. 숙소로 가는 길, 폭격을 당해 골격만 앙상하게 남은 집들을 보면서, 일행의 긴장감은 높아졌다. 아직 코소보에서 때때로 테러가 발생한다는 경고도 들은 상황이었다. 우리의 숙소는 언덕배기에 위치한 낡은 호텔이었다. 숙소의 옆에는 하필이면 공동묘지가 있었다. 코소보 분쟁으로 숨진 사람들의 무덤도 있었다. 프리슈티나는 네댓개의 산들이 도심을 에워싸고 있는 분지였다. 숙소에 짐을 풀고 카페가 있는 옥상에 오르자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멀리는 산등성이를 타고 늘어선 집들도 배경을 이뤘다. 마치 성곽 같은 언덕의 호텔에서 내려다본 도시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차라리 어둠이 빠르게 내려앉아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면 좋으련만, 어둠에 젖어가는 주황색 벽돌의 집들과 회색빛 건물들의 풍경은 음산하기 그지없었다. 공포영화에서 드라큘라의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인간의 마을 같았다. 때마침 까마귀는 까악~까악~ 울어대고, 공동묘지는 자꾸 생각나고, 정말로 으스스했다. 어둠을 타고 공포가 살 속으로 젖어드는 느낌이었다. 정말 음산한 공포란 이런 것이구나, 드라큘라의 고향이 멀지 않은 곳에서 비로소 드라큘라영화의 정서를 이해했다.

3주째 독일에 머물고 있다. 월드컵 대표팀 경기를 따라서, 경기가 없는 날에는 다른 취재거리를 찾아서 이 도시 저 도시에서 동가식서가숙하다 보니 어느새 독일 철도 마일리지 5000㎞를 넘었다. 독일 기차를 타면 창밖으로 보이는 평지에 농가와 마을이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게 드문드문 이어진다. 여기선 사람 사이의 거리도 그렇다. 너무 크지 않은 도시에, 너무 북적이지 않는 거리에서 그들은 살아간다. 늦은 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차창 밖으로 혼자 여행가방을 끌고 출구로 향하는 사람이 보였다. 아, 이런 풍경과 저런 일상이 그들의 쓸쓸한 정서에 바탕이 되는구나. 아메리카의 평야처럼 황량하지도 않고, 동아시아의 도시처럼 밀착되지도 않는 거리가 만들어내는 정서, 뭐 이런 게 모더니즘의 정서인가? 동양의 아저씨는 생각에 잠겼다. 이렇게 의심 많은 자의 여행은 뜻밖의 의심을 풀어주는 선물을 주기도 한다. 선현께서 이르시기를,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했던가. 보고 싶으면 볼 수 있는 이들도 있지만, 보고 싶어도 못 보는 사람도 많다. 바야흐로 부의 부익부 빈익빈이 정서의 부익부 빈익빈으로 이어지는 세상이다. 부디 모든 이들에게 공평한 여행의 기회가 주어지는 세상이 오기를. 회사에서 해외출장 보내주기 전에는 비행기 한번 타보지 못했던 아저씨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