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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적>과 <비열한 거리>가 몸에 의지하는 이유

호스티스에서 호스트로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즈음의 남성 버디영화에서 문제의 핵심은 재/개발을 둘러싼 이권 다툼이다.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조인성)는 엄마와 동생들이 살고 있는 자신의 집이 철거되는 상황을 맞아 전세금을 구하러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결국엔 자신이 철거전문 조폭이 된다. 병두는 재개발을 성공시키면 그야말로 일확천금을 노려볼 수 있다는 보스의 말을 맹신한다. <짝패>는 말 그대로 ‘액션스쿨 매뉴얼’(정성일 평론가)로 가상의 도시인 온성 개발을 둘러싸고 벌이는 종횡무진 “부동산 활극”이다.

<강적>

영화 <강적>에서 주인공 수현(천정명)은 조폭 생활을 청산하고 연인 미래(유인영)와 분식집을 운영한다. 버스를 개조한 일종의 모바일 스타일 분식집이다. 반면, 수현이 성장한 고아원 원장이며, 자신이 기른 고아들을 임의적으로 편리하게 조직 폭력배로 영입하는 황종채(오순택)는 빌딩을 비롯해 결코 모바일하지 않은 ‘부동산’ 획득에 수현과 다른 고아들을 이용한다. 고아원에서 형제처럼 자란 친구 재필(최창민)의 부탁에 수현은 꺼림칙한 함정으로 걸어들어간다. 재개발과 부동산 투기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많은 사람이 어디 조폭들뿐이겠는가? 영화를 보는 우리도 직·간접 피해사례 및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현 정부 차원에서도 부동산은 부동의 문젯거리다. 철거문제는 70년대 고도 개발 성장 때부터 줄곧 사회적 악으로 재현돼왔지만 현재 부동산 활극의 요점은 바로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지분을 요구해야 한다고 맹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부동산 활극 영화들에는 조폭의 스케일을 넘어 사회 각층과 얼기설기 얽혀 있는 재개발 같은 사회문제가 노출되는 셈인데, 사회정의에 대한 감각은 찾을 길이 없다. 문제는 도출되고 노출되는데, 그것을 풀려는 의지도 또 풀어질 것이라는 낙관도 없는 것이다. 이렇게 비관주의와 냉소주의가 팽배한 가운데 몸에 커다란 용이나 호랑이를 새긴 미소년들이 길고 긴 다리로 막힘없는 돌려차기를 하며 등장한다. <강적>과 <비열한 거리> 모두 몸에 문신을 한 이 미소년 조폭의 출현을 영화 안에서 강조하고 부각한다. <비열한 거리>에서 외양적으로는 로비력있는 사업가요 내부적으로는 조직폭력배를 관리하는 황 회장(천호진), 병두와 그의 보스 상철(윤제문)을 비교하면서 이즘은 병두처럼 생겨야 성공한다고 평한다. <강적>에서 현상 수배가 붙은 수현의 키 180cm가 주지된 가운데, 수현은 경찰을 피해 훌쩍 담을 뛰어넘는다. 단신인 강력반 형사들은 담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 수현을 놓치고 만다. 키 큰 미남 조폭 시대다.

부동의 지위를 가진 1인자의 존재

<비열한 거리>에서 위계질서는 2개 군으로 나뉜다. 병두의 입장에서 보자면 우선 그냥 형님인 직속 보스와 아래 ‘식구’들이 있다. 그리고 엄연히 회장이라는 사회적 호칭을 가지고 있는 황 회장과의 관계가 있다. 첫 번째 군이 주먹과 경륜으로 쉽게 판가름나는 데 비해 두 번째 군이 만들어내는 세계는 불투명하다. 황 회장과 같은 사람이 사회의 지도 계층인 검사 등과 친분을 맺고 있어 병두의 시각으로 보자면 접근 불가능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그 검사를 살해함으로써 병두는 황 회장의 측근이 된다. 그리고 그 자리 보존을 위해 자신의 직속 ‘형님’을 죽인다. <비열한 거리>에서 대립 구도를 이루는 것은 조직의 이러한 두개의 질서이지 경찰이나 검찰과 조폭의 대결이 아니다. <강적>은 기본적으로 경찰과 조폭의 대립을 인준한다. 그러나 물론 경찰과 조폭 사이에 기묘한 동반이 이루어지면서 그 대립은 깨진다. 두 영화에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1인자의 부동의 지위다. <강적>의 황 회장이나 <비열한 거리>의 황 회장이나 영화에서 어떤 이전투구나 용쟁호투가 있어도 부동의 위치다. 죽어나가는 것은 2인자나 3인자다. <강적>의 황 회장은 <비열한 거리>의 황 회장처럼 되도 않는 늙어가니 현명해지고 어쩌고 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영화를 끝내지는 못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어떤 위협도 받지 않는다. <짝패>에서도 서울의 회장은 무사하다. <사생결단>에서도 죽어나가는 것은 아랫사람들이다.

이렇게 윗사람들은 건재한 채 아랫사람들끼리 죽고 죽이는 이 영화들이 보여주는 절대자에 대한 기죽음이나 그 패배감의 경로가 궁금하다. 그렇다고 내가 해피엔딩을 맹신한다거나 어떠한 문제 해결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억지춘양 희망의 길을 내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강자의 절대군림이 사회적 변화를 포기한 절대절망의 징조가 아니기를 다른 영화에서라도 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70년대 호스티스영화의 2000년대식 남성 판본

나는 이들 영화에서 사회적 ‘인정(recognition)의 구조’의 부재가 징후적이라고 생각한다. 병두는 사회·정치로부터의 인정을 전혀 욕망하지 않는다. 수현도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과 폭력 조직뿐이다. 비사회적, (비)정치적 조직으로서의 조폭은 그러나 아름다운 청년의 영구 중간 집권을 그냥 두고 보지 않는다. 합법과 위법 사이를 교묘하게 줄타기해야 하는 자본과 폭력은 이들의 사회적 순진함과 상승의 욕구를 잠정적으로 이용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의 짝패영화들은 70년대 호스티스영화의 2000년대식 남성 판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예컨대 장동휘나 박노식 주연의 60, 70년대 활극영화들의 호방과 무정부성 그리고 비관주의적 성향을 잇고 있는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별들의 고향>이나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나 경아가 경험했던 나락에 떨어진다. 젊고 아름다운 하위 주체가 도달하게 되는 패착 지점으로 밀려간다.

<비열한 거리>

병두나 수현은 아름답고 젊다. 가난하다. 그러나 무기력한 상태는 아니다. 그들은 몸을 지독하게 극대화해 가난에서 벗어나려 한다. 성공보다는 가난을 이기려는 것이다. 경아나 영자나 병두나 수현의 패착은 몸이 그 수가 되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패착은 바둑에서 그곳에 돌을 놓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 판에 지게 된 나쁜 수다. 현상적으로 이들의 패착은 몸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들이 대중영화로서 은연중에 공감대로 깔아놓은 아무리 ‘몸을 팔아도’ 해결되지 않는 작금, 커져만 가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간극이다. 빈부의 심각한 차이가 진정한 나쁜 수다. 패착을 가져오는 사회적 적대 변수다. 그러나 이 간극이 계급적 적대로 바뀌는 대신, 최근 영화들은 몸을 통한 봉사와 해결을 통해 빈곤이 적극적으로 부의 측근이 되려한다. 부자는 빈곤한 자의 스폰서로 욕망된다. 부동산 활극에서 상승의 가능성은 큰 스폰서를 잡는 일이다. <비열한 거리>에서 병두는 검사를 죽이고 황 회장을 스폰서로 잡는다. 수현과 그의 친구 재필, 서 이사의 스폰서는 황종채다.

기존 형님의 상위 체계인 스폰서는 종적, 횡적으로 사회의 특권 계층과 엮여 있다. 이들은 <비열한 거리>의 검사의 표현처럼 반은 사회인이고 반은 조폭이다. 이 스폰서 유형은 힘만 쓰는 기존의 상철보다는 병두와 수현, 재필과 같은 몸을 잘 쓸 뿐만 아니라 미남이기도 한 ‘호스트’들을 거느리고 또 이들을 동세대의 다른 자들이나 그 차세대로 바꾸며 위계를 유지한다. 이들 스폰서는 전 세대 아버지, 형의 권위를 누리지만 그들의 사회적 책임감은 조금도 나누고 있지 않다.

미소년들로 한껏 멋을 낸 비극적인 부동산 활극

<강적>에서 수현의 연인 미래는 수현이 필요한 목돈(형사의 아들의 장기이식에 필요한 돈이다)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호스티스로 복귀한다. 이들 부동산 활극의 호스트들과 호스티스는 몸만 쓰고 결코 현재 한국사회에서 부동산 재개발, 재테크가 의미하는 자본과 권력에 접근하지 못한다. 97년 IMF와 세계화 이후 심해졌지만 한국영화에서는 모든 사회적 문제가 ‘남성’ 수사법으로 고민되어 영화적 재현의 장에 ‘여성문제’가 사라져가는 것은 물론이고, 여성적 차이마저 남성 캐릭터에 흡수되고 있다. 여성을 어떤 방식으로든 말할 수 있는 재현에서의 정치적 공간이 대중영화에서 희미해져가고 있는 것이다. 호스티스는 호스트가 되고 호스티스는 호스트의 비극을 더 강조하는 보조물이다.

이들 영화에서 조인성과 천정명만이 아니라 진구, 최창민 등의 연기자는 이 부상하는 스타일리시한 부동산 액션영화의 새로운 아이콘들이다. 스폰서인 황종채를 연기하는 오순택은 짧게 나오지만 도착적 성격의 스폰서, 아버지 역을 매우 인상적으로 해낸다. <강적>의 영화 스타일은 핸드헬드 카메라와 빠른 템포로 뮤직비디오처럼 감각을 업데이트화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래도 ‘인생에 뭔가 있다’는 가치쪽으로 접근해간다. 그래서 나쁘지 않은 의미의 ‘올드 스쿨’쪽에 가깝다. 이 영화가 총을 맞은 수현을 차에 태운 성우가 그래 인생엔 뭐가 있을지도 몰라라고 되뇌면서 서울로 들어갈 때, 멀리 보이는 도시 풍경은 명백히 CG 화면, 컴퓨터가 그려낸 환상 도시다. 실재의 서울 풍경은 환상조차 품을 수 없다는 듯 말이다. 잘 처리된 결말이다.

<강적>과 <비열한 거리>는 이렇게 한발은 낡고 친숙한 것(가족의 가치 등)에 그러나 다른 한발은 동시대의 남성들을 짓누르고 있다는 압박으로 추정되는 가진 자가 될 수 없는 위협과 절망을 내비친다. 그것을 미소년들을 통해 한껏 멋을 내 다룬다. 부동산 활극, 액션영화는 재빠른 몸이라도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부패의 골, 썩은 심연을 보여준다. 기어서라도 올라와! 이렇게 말하는 영화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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