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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의 미장센 [1]

지난 한달이 월드컵과 함께 흘러갔다. 공 하나를 놓고 벌이는 이 축제는 이번에도 전세계를 설레게 만들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만국공용어인 축구의 매력이 그만큼 크다고 말할 수 있지만 한 꺼풀 벗겨보면 축구 자체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월드컵은 내가 축구를 하면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시청자로 축구를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평소 축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알려진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월드컵에 관한 글을 쓰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축구 중계의 기술부터 미학까지 다방면에 걸쳐 월드컵의 미장센을 분석한 글을 보내왔다. 축구보다 재미있는 축구 중계의 놀라운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나는 축구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솔직히 고백하면 오프사이드를 눈으로 보고도 그게 오프사이드인지 모른다. 그냥 주심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가보다, 한다. 나는 한국 대표팀 선수들의 이름을 외우지 못하며, 올해 월드컵 스타들의 이름으로 열 손가락을 채우지 못한다. 토고전이 있던 날 나는 잠을 잤으며, 프랑스전은 중간부터 보았고, 스위스전만 처음부터 보았다. 게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나만의 팀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를테면 (<씨네21>의) 오정연은 “아르헨티나, 잉글랜드, 브라질전은 기본적으로 봐줘야 하는 경기”라면서 차례로 열거했다. 축구의 열혈 팬(이자 나의 축구 관람가이드 선생님)인 허문영은 거기에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를 꼭 보라고 강추한다(그런데 그만 탈락했다. 아쉬운 일이다). 심지어 <<씨네21>에 ‘issue’ 칼럼을 연재하고 있는 (<한겨레21>의) 김소희는 산후 4주째 되는 날 프랑스전을 보았다고 자랑스럽게 썼다(<씨네21> 제 559호, ‘아이♡월드컵’). 나는 안다. 4주째 된 아기의 그 무시무시함을. 차라리 아기라기보다는 킹콩이라고 부르고 싶은 막무가내의 액션들. 실신 직전의 기진맥진 상태에서 텔레비전을 보다니! 나는 그런 일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감히 월드컵에 대해서 쓸 자격이 없다.

그런데 무심코 오정연의 ‘허벅지의 미학’을 읽었다(<씨네21> 제559호, 기자들의 오픈칼럼). 거기에는 “(중략) 게다가 허벅지의 관점에서 대부분의 골은 아름답다. 속이 시원해지는 중거리 슛은 전체적인 각선미를 살필 수 있고, 접전 끝에 가까스로 들어가는 골은 비교적 장시간의 감상이 가능해 좋다. (이런 기준에서 코너킥 혹은 프리킥 이후 헤딩으로 이어지는 슛은 점수가 다소 낮다) 문제는 이런 편협한 기준을 가지면 사소한 불만이 많아진다는 점(중략)”이라고 안타깝게 썼다. 이 글은 내게 문득 축구에 대해서 생각할 기회를 주었다. 이 글은 기묘하게 읽힌다. 오정연은 여기서 축구를 말하는 대신 그걸 중계하듯이 쓴다. 그때 오정연의 자리는 스타디움이 아니라 카메라의 눈이다. 줌렌즈가 되어버린 오정연의 눈, 붐마이크가 된 오정연의 귀. 언제라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리를 바꾸면서 몸싸움을 볼 수 있는 앵글과 리버스 앵글로 자유자재로 옮겨다니는 편집된 오정연의 비행술. 지가 베르토프적인 이미지-쓰기, 혹은 기계-되기. 축구선수들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차라리 축구라는 기계가 작동하는 방식으로서의 축구선수들의 육신. 그리고 그 육신을 재현하는 기계적인 눈. 마치 눈앞에 그것이 보이기라도 하는 듯 고백하는 오정연의 섬세한 기술은 축구라는 관능미, 축구의 에로티시즘이 사실상 축구라는 스포츠 자체라기보다는 그 축구를 본다는 능동적 착각에 뛰어들어든 테크노-이미지-쓰기이다. 그때 오정연의 눈과 귀는 사라진 매개항으로서의 텔레-비주얼한 스펙터클의 포획에 내맡겨진 감각의 확장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오정연의 이 기술은 스타디움에서는 쓰여질 수 없는 글이다. 좀더 정확하게 이 글은 축구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축구에 대한 ‘중계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말하자면 스펙터클의 이미지-라이브. 스타디움에 앉아서는 중거리 슛을 찰 때의 각선미를 보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혹은 접전이 벌어지면 그것을 분석적으로 보는 것은 텔레비전이다. 그때 우리가 보는 것은 축구로 위장된 텔레비전의 수사학이다. 마셜 맥루한의 유머에 가까운 선언. 미디어는 메시지이다! 우리는 정말 무엇을 보고 있는가? 말하자면 그때 나는 축구가 아니라 축구라는 스포츠의 중계-미장센(mise-en-‘football’-televisuel)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축구 중계가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에서의 로마 콜로세움 안에서의 ‘아날로그’ 전차경기 장면 혹은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에서의 막시무스의 콜로세움에서의 검투사 ‘디지털’ 장면들과 어디서 만나고 어디서 헤어지는지를 생각하면서 월드컵 중계를 보았다. 원형경기장에서의 대결. 환호하는 관중. 보이지 않는 카메라. 하지만 절대적으로 그 장소 바깥에서 멀리 떨어진 채(tele) 카메라라는 기계에 의지해서(techno) 마치 거기 있는 것처럼 착각하면서 구경하기(spectatorship).

스포츠 중계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약간의 우회.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그 자신만의 필요에 의해서 선형 발전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영화는 수많은 테크놀로지들의 불균등 복합 구성체에 가깝다. 라디오와 사진과 축음기의 상이한 발전단계의 비동시적 동시성으로서의 접합(articulation). 그때 영화라는 미디어는 역사의 무엇에 빚지고 있는가? 여기에 폴 비릴리오는 대담하게 영화의 테크놀로지는 전적으로 전쟁에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 또는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에서 재인용하자면) “시나리오 작가 아니타 루스는 할리우드는 1차 세계대전에 귀속된다”고 선언한다. 전쟁은 정확한 목표물을 노리기 위해서 점점 더 정교한 시뮬레이션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지각의 병참술’이라고 불리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시뮬레이션은 점점 더 전쟁과 영화를 분간하기 힘든 것으로 만들었다. 혹은 전쟁은 영화를 매개로 하여 게임으로 이행했다. 사실상 오늘날 펜타곤에서 하는 일의 축소판을 매일 밤 우리의 아이들은 컴퓨터 모니터 화면 앞에서 수행한다. 목표를 맞추는 일은 카메라에서 줌렌즈가 대상의 초점을 맞추는 일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나는 비릴리오와 똑같은 이유로 텔레비전의 테크놀로지는 스포츠에 빚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영화가 대상을 의심하면서 따라가는 동안 텔레비전은 대상을 설명하고 분석하려고 한다. (벤야민의 말을 흉내내면) 대중은 영화를 볼 때 세상에서 떨어져나와 자기가 사는 세상을 낯설게 쳐다보지만, 집 안의 소파에 누워서 텔레비전을 볼 때는 부주의하게 다시 세상의 일상생활의 일부로 돌아간다. 당신이 들뢰즈주의자라면 이렇게 말하고 싶을 것이다. 영화는 탈영토적이지만 텔레비전은 재영토적이다. 영화를 보는 행위는 (일시적인) 일탈이지만 텔레비전을 쳐다보는 건 (무비판적인) 습관의 일부이다.

8강전부터 경기시작 전 양팀의 주장이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선언문을 낭독하는 행사가 마련됐다.

물론 스포츠를 바라보는 방법을 발명한 것은 (아직 텔레비전이 도착하기 전의) 영화이다. 전쟁과 영화와 스포츠의 삼위일체를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2차 세계대전을 수행한 독일인들이다. 그걸 단지 아돌프 히틀러만의 공으로 돌리는 것은 여기에 관련된 수많은 ‘예술적인’ 장교들, ‘지휘관 같은’ 예술가들, 특히 레니 리펜슈탈, 그리고 ‘병사들과 같은’ 선수들을 무시하는 처사일 것이다. 그들은 2차 세계대전과 베를린올림픽과 영화를 하나의 스펙터클로 만들었다. 그때 영화는 스포츠를 (종목마다 서로 다른 전술을 이용해서 선수들을 타깃으로 삼아) 전쟁처럼 찍었고(<민족의 제전>), 전쟁(을 위한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을 스포츠처럼 찍었다(<의지의 승리>). 하지만 독일이 전쟁에서 졌다는 이유만으로 스포츠를 찍은 레니 리펜슈탈이 비난을 받는 것은 옳지 못하다. 그로부터 일년 뒤 존 포드는 태평양 전쟁의 현장에 나가서 전쟁을 찍었다. 그 둘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이 자리는 그 윤리성을 물어보려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영화가 전쟁에서 고개를 돌리면 맞은편에 스포츠가 있다. 그 둘을 찍는 것은 동일한 행위이다. 말하자면 스펙터클. 그리고 그 현장으로부터 우리를 안전하게 구경꾼의 자리에로 안내하는 것. 오늘날 올림픽의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고전적인 ‘중계-문법’의 수사학은 여기서 발명되었다. 존 포드가 서부극에서 한 것을 레니 리펜슈탈은 스포츠 중계에서 했다. 하지만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 스포츠 중계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1998년 프랑스 축구 중계 감독 중 한 사람이었던 프랑수아 샤를 비도는 그걸 오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중계는 다큐멘터리에 가까울 뿐입니다.”

더 잘, 더 가까이, 다시 보기 위해 방송 중계가 시작됐다

그러나 영화가 근본적으로 스포츠와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이미 라디오와의 경쟁에서 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미 결과를 알고 있는 경기란 스포일러를 다 알고 난 다음의 영화보다 더 재미없는 법이다. 대중은 느림보의 소식을 기다리느니 차라리 천리의 소식을 전해 듣는 장님이 되는 편을 택했다. 이때 말 그대로 멀리 떨어져서 원격(tele)으로 보여주는(vision) 텔레비전의 동시성은 영화가 해낼 수 없는 뉴스라는 측면을 부여했다. 스포츠의 일회성은 동시성을 동시에 요구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1930년 첫 번째 월드컵을 쥘 리메의 스포츠 정신의 이상주의에 따라 중계가 불가능한 우루과이에서 열 수 있었던 것은 아직 텔레비전으로 축구를 중계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를테면 올해 브라질과 프랑스의 경기가 시작되기 전 선수들이 나와서 플래카드 주변에 선 다음 낭독을 하고 기념촬영을 했다. 거기에는 “인종차별주의에 대해서 ‘노’라고 말하라!”(Say ‘NO’ to Racism)라고 쓰여 있었다(그런데 한국방송은 이 장면이 45초 가까운 시간 동안 화면에 보이는데도 선수들의 전력을 소개하는 데에만 할애했다. 한국 선수들은 다민족 구성체가 아닌 단군 구성체(?)라서 이런 문제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일까?). 그러나 오늘날 그 취지에 동의한다 할지라도 이를테면 위성중계가 불가능한 저개발 국가 지역에서 월드컵을 개최하는 것이 가능할까? 물론 동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인공위성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1970년 미국은 지구 위의 하늘을 공개하자는 정책(Open Sky Policy)을 제시한 다음 인공위성을 쏘아올리기 시작했다(그때 미국과 소련 말고 누가 인공위성을 쏘아올릴 수 있었을까?). 그해 멕시코월드컵은 첫 번째 위성방송 축구 중계였다. 경기장은 선수들의 기량과 감독의 전략이 빚어내는 조화의 세계이지만,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테크놀로지와 자본의 정보시장이 만들어내는 연대기이다. 경기장 안은 정정당당한 실력을 요구하지만, 경기장을 보는 것은 돈의 문제이다. 그때 이 관람의 행위에서 아무도 스포츠 경기를 마치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나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수없이 다시 들으면서 받는 감동과 같은 경험을 위해서 반복해서 보지는 않는다. 만일 당신이 감독이나 선수가 아니라면 당신은 당신이 응원하는 팀 혹은 선수의 승리만을 다시 본다. 아무도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진 게임을 다시 보지는 않는다. 그래도 본다면 당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결정적인 장면만을 발췌해서 본다. 그때 스포츠는 텔레비전에 자신의 게임의 규칙과 활용을 설명하고 분석할 수 있는 테크놀로지를 요구한다. 스포츠 구경의 간절한 세 가지 욕망. 더 잘 보기 위해서, 더 가까이 보기 위해서, 다시 보기 위해서.

현장과 포스트 프로덕션이 동시에

그러므로 이 글은 월드컵에 관한 작은 명상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그 반대로 그 열광의 수사학을 불러일으키는 중계라는 형식의 스펙터클의 가시성을 물어보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월드컵에서 축구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물어보려는 것이다. 2006년 독일월드컵은 키르히 스포츠 AG가 중계판권을 갖고 HBS에서 중계하였다. 한국의 방송들도 당연히 HBS가 제공하는 영상을 받아서 방영하였다. HBS는 경기장 안에 24대의 카메라를 놓았고, 각기 다른 화면을 제공하였다(그리고 각 방송사는 자사의 아나운서와 해설위원을 보여주기 위해서 각자의 카메라를 설치하였다. 그러므로 정확하게 경기에 동원된 카메라는 25대이다). 내가 2006년 월드컵에서 (7월2일까지) 본 경기는 모두 7경기. 한국의 세 경기, (나는 토고전을 보지 못했다) 브라질과 일본, 네덜란드와 아르헨티나, 잉글랜드와 포르투갈, 그리고 브라질과 프랑스이다. 나는 (영화처럼 말하면) 매 경기를 25개의 자리를 옮겨다니면서 보았다. 하지만 25개의 화면을 내가 선택해서 보는 것은 아니다. 24개와 1개의 동영상은 하나의 스튜디오로 전달되고, 그것을 선택하여 전달한다. 말하자면 중계는 현장과 포스트 프로덕션이 동시에 진행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중계의 편집에는 성찰이나 사유가 있을 수 없다. 모든 동영상을 수집하는 스튜디오에서도 10초 뒤의 상황을 예상할 수 없다. 공이 골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고작 몇초 안의 일이다. 이를테면 영국과 포르투갈의 승부차기의 결말을 어떻게 예상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할 뿐 예상할 수 없는 경기의 내용을 따라가야 하는 편집. 중계는 지성이 아니라 지각의 산물이다. 이때 이 편집의 핵심은 리듬이다. 그러나 이 리듬이 반드시 눈앞에 진행되고 있는 게임의 내용을 따라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경기를 본 내 판단이다. 종종 이 리듬은 화면 바깥에 있는 비가시적이지만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경기의 남은 시간과 두팀 사이의 점수 차이가 또 다른 리듬을 만들어낸다. 말하자면 중계는 두개의 리듬 사이의 긴장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지각과 판단 사이의 대위법적 관계이다. 경기장 안을 자유로이 달리는 나비의 리듬과 시선의 거미줄에 걸려든 목표물의 작은 율동에도 반응하는 거미의 리듬. 그 두개의 리듬 안에서 활동을 시작하는 기능들과 그에 관한 극화되어가는 심리. 하나의 경기장, 그러나 그 위를 자유로이 이동하는 매끈한 경기장으로서의 표현, 거기에 부여된 내용으로서의 홈 파인 경기장.

오프사이드가 아니라는 주심의 결정에 선수들이 거세게 항의하고 있다. 한국과 스위스전.

이를테면 한국과 스위스전. 오프사이드인 줄 알았는데 아니라는 판단 이후 이어지는 경기에서 지금 진행되고 있는 화면의 가시적인 스펙터클 자체는 골인 선언 이전과 당연히 어떤 차이도 없다. 이어지고 있는 장면은 경기의 연속일 뿐이다. 그러나 골을 넣은 것과 넣지 못한 것, 오프사이드 선언의 모호성, 자꾸만 경기의 시간을 골인 이전으로 돌리고 싶은 심정, 고작 10여분 남은 시간, 여기에 더해 만일 이 경기에서 진다면 16강 진출에 사실상 실패한다는 사실. 만일 같은 시간대에 진행된 경기에서 토고가 프랑스를 이겨서 이 승부의 결과에 관계없이 16강행이 이미 결정되었다면 이 순간 남은 시간 동안의 경기를 보는 심리적 리듬과의 차이를 구태여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또는 동일한 결과인데도 불구하고 브라질과 (히딩크가 이끄는) 호주와의 경기를 보고 있을 때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경기도 2 대 0으로 끝났다) 그 스펙터클이 불러일으킨 감각-리듬의 차이. 이때 나의 질문은 이것을 단지 국적의 차이만으로 이 모든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 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월드컵을 보는 것이 아니라 끔찍하게도 민족주의만을 보는 것이다. 혹은 축구를 전쟁을 수행하는 병사들의 전투를 보는 것처럼 구경하는 것이다. 그때 축구와 전투의 차이는 정서적으로 동일한 것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사태가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