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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내겐 참 좋은 브라질
장미 2006-07-21

감정은 온전히 기억에 기대 있다. 어떤 기억을 지니고 있으냐에 따라, 하나의 대상에 대한 감정의 빛깔은 무한히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남미의 브라질을 떠올려보자. 축구에 열광하는 이들은 아드리아누, 카카, 호나우지뉴 등을 거느린 브라질 축구 군단을 기억하며 흥분과 설렘을 느낄 것이다. 카니발에 사로잡힌 이들은 삼바 리듬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상상을 할지도 모른다. 반면, 객관적인 정보를 중시하는 다른 이들은 브라질이 브릭스(BRICS) 국가 중 하나에 속하며, 현재 집권 중인 룰라 대통령이 한때 금속노동자였다는 식의 무미건조한 자료를 되새길 것이다. 내 기억 속에도 브라질이 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여는 키워드는 두개다. 남자친구, 그리고 스콜.

첫 번째 키워드, 남자친구. 2004년 여름, 한 단체에서 다른 나라의 문화를 체험할 대학생들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읽은 나는 지원서를 제출했다. 그 뒤 덜컥 문화체험단으로 선정됐지만, 애초 지원한 프랑스팀이 아닌 브라질팀으로 보내져 열흘 동안 브라질에 머물게 됐다. 남자친구는 브라질팀원 중 한명이었다. 낮게 흥얼거리는 듯한 느낌의 낯선 브라질어, 작은 동양인들에게 쏟아지던 날카로운 시선과 검은 아이들의 시원한 웃음, 야자수 아래 몸을 누인 걸인들의 낮잠, 치마 위에 쏟아지던 우윳빛 코코넛 즙, 산꼭대기에 아찔하게 솟아오른 거대한 예수상, 그리고 말없이 응시했던 차창 밖 풍경까지. 브라질에서 급격히 친해진 그와 나는 그곳에서의 기억을 공유했다. 그래서 브라질이라는 3음절의 단어는 가장 먼저 남자친구를 생각하게 한다. 노천시장을 걸으며 나눴던 짧은 대화와 어색했던 침묵, 해변가에 나란히 서서 느꼈던 짠 바닷바람 따위와 함께.

두 번째 키워드, 열대지방 소나기 혹은 브라질 맥주 명칭인 스콜. 스콜은 소나기라는 이름이 딱 어울리는 시원한 라거맥주다. 비유를 동원하자면, 아주 영특하지만 매혹적인 미녀(혹은 미남)라고 할까. 브라질에 머물렀던 열흘 동안 나와 팀원들은 매일 스콜의 유혹에 넘어갔다. 밤마다 노천카페를 찾아 맥주캔을 기울이는 것이 일과가 됐을 정도였다. 우리는 과거, 어린 시절, 첫사랑부터 시작해 진로, 꿈, 여자, 남자, 미래, 결혼, 운명까지 온갖 주제들을 안주삼아 맥주를 마셨다. 며칠 동안 우리의 얼굴을 익힌 싹싹한 웨이터는 따로 주문을 하지 않아도 알아서 척척 스콜을 내왔다. 맥주캔이 하나둘 쌓여가고 동시에 서서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우리는 옆사람과 팔짱을 낀 채 숙소 앞 코파카바나 해변을 거닐었다. 스콜의 힘은 대단해서 우리는 시종일관 비틀거리면서도 밤산책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저 스콜 때문에 무한히 행복한 기분이었다.

올해 8월이 되면 브라질에 다녀온 지도 벌써 2년이 넘는다. 어느 날 지구본에서 찾아본 브라질은 우리나라의 정반대편에 있었다. 과연 살면서 다시 브라질에 갈 일이 있을까? 지구본 위에 빼곡히 박힌 수많은 나라를 거쳐 훌쩍 그곳으로 떠날 일이 생길까? 그러기에 그곳은 너무 멀다. 미친 척하고 지구 반 바퀴를 돌지 않는 한, 브라질은 다시 만날 일 없는 멀고 먼 당신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브라질은 기분 좋은 나라다. 남자친구가 내 옆에 있어서 든든하듯, 그때 스콜이 달콤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브라질은 내게 참 좋은 나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