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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저널리스트 존 알퍼트를 만나다 [2]
장미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6-07-25

세계의 전쟁터를 누비고 세기의 권력가들과 인터뷰

<라스트 카우보이>

1980년 이란인들이 이란에 대한 미국의 간섭에 반발하며 미국인들을 인질로 붙잡아두는 사건이 발생하자, 알퍼트는 곧장 이란으로 건너갔다. 다른 방송사들이 대사관에 카메라를 고정시켰던 반면, 그는 뒷골목과 시장들을 누비며 인질 사건에 대한 이란인들의 반응을 이끌어냈고, 이는 그가 찍은 영상물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점으로 작용했다. 또한 그는 당시 이란에 머물렀기에 구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으로 향할 수 있었다. “뒤늦게 출발한 다른 기자들은 아프가니스탄에 들어올 수 없었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아프가니스탄은 이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사막을 통해 걸어가기로 했다. (웃음)” 그것만이 아니다. 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자 알퍼트는 집중 폭격의 대상이었던 바그다드로 걸음을 옮겼다. “당시 사담 후세인쪽에서 서안(한?)을 보내 촬영 금지 사항들을 전달했다. ‘찍으면 안 된다’투성이였다. 나는 이것을 깨고 전쟁 중 벌어진 일들을 모두 담아왔지만, 정작 <NBC>에서 이라크에서 찍은 영상물의 방영을 거부했다. 전쟁에 관해서라면 이라크 정부 못지않게 미국 정부 역시 마음에 걸리는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일로 인해 <NBC>와 결별한 알퍼트는 이후 <HBO>를 통해 자신의 영상물을 선보여왔다.

이처럼 전세계의 전쟁터를 누볐던 알퍼트였기에 세기의 권력가들을 직접 인터뷰하는 기회 역시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쿠바의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직접 인터뷰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카스트로는 멋진 사람이었다. 아주 친절했을 뿐 아니라 인터뷰에도 적극적으로 응해줬다. 그러고보니 그가 쿠바를 장악한 지도 40년이 넘었다. 한번쯤은 카스트로를 다시 인터뷰하고 싶은 생각도 든다. <라스트 카우보이>를 25년 동안 찍었던 것처럼 그가 변해가는 모습을 찬찬히 카메라에 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는 현재 미국에 감금돼 있는 이라크 전 대통령 사담 후세인을 만나기도 했다. 후세인에 대한 그의 평가는 냉혹했다. “후세인이 한 행동들은 비판받을 만했다. 그가 현재 갇혀 있는 것은 지금껏 그가 저지른 일 때문이다.”

이후 존 알퍼트는 미국 내의 사회문제에 대한 다양한 탐사 보도를 시도하게 된다. 그중 가장 먼저 손댄 것이 범죄자들의 삶에 대한 비디오였다. <범죄의 세계에서 보낸 1년>(1989), <교도소: 라이커스 섬의 죄수들>(1994), <라틴 킹: 거리의 범죄자 이야기>(2003) 등을 연출한 그는 “범죄자들이 왜 그렇게 자라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해 보여주려 했다. 스포츠에도 관심을 기울여온 그는 여자농구단의 얘기를 담은 <신데렐라 시즌: 레이디 볼스팀 반격하다>를 만들기도 했으며, 가장 최근작인 <바그다드 ER>(2006)을 통해서는 바그다드에 있는 미군 병원의 모습을 그려냈다. 알퍼트는 잠시도 멈춰 있지 않고 끊임없이 관심사를 넓혀왔고, 그러한 노력 때문인지 에미상부터, 컬럼비아 듀퐁 어워드, 크리스토퍼 어워드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내가 받은 상이 몇개냐고? 더이상 세지도 않는다. (웃음) <HBO>쪽에서는 좋아하더라. 자기 방송사를 통해 방영된 작품들이 상을 타면 보너스를 받는다고. 나한테 떨어지는 건 없다.”

제3회 EIDF, <파파> <라스트 카우보이> 등 4편 선보여

제3회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에 초청된 알퍼트의 작품은 모두 네편. 그중 <파파>(2001)에서 그는 자기 아버지의 모습을 담았다. “아버지는 나의 영웅이기 때문에 이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영화 전반부에 나오는 문구는 아버지에 대한 애정이 이 작품을 찍게 된 직접적인 동기임을 드러낸다. 거기에 그는 일종의 “직업의식”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우리 가족은 자신의 얘기를 서로에게 잘 털어놓지 않는 편이었다. 하지만 내 직업은 다른 사람의 입을 여는 것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스스로에게 당당하기 위해서라도 내 가족의 얘기를 털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카우보이 베른 세이거를 25년 동안 취재해 완성한 <라스트 카우보이>(2005)는 알퍼트의 집요함으로 더욱 빛을 발한다. “나는 사우스 다코타의 포큐파인에 사는 베른 세이거다. 여기 있는 이 남자(존 알퍼트)는 나를 찍기 위해 25년 전에 이곳에 나타났다.” 알퍼트가 세이거를 쫓게 된 데에는 카우보이에 대한 경외심이 어느 정도 작용했다. “내가 어렸을 때 미국 소년들의 우상은 카우보이였다. 그러니까 베른 세이거는 사실 내 어릴 적 우상이나 다름없다! (웃음)” <라스트 카우보이>에서 알퍼트는 세이거와 친밀한 관계임을 드러내지만, 여전히 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 애쓴다. 반면 코발트에 중독된 노동자들을 다룬 <하드 메탈 증후군>(1988)에서 그는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편에 서 있다. “당신들은 혹시 코발트의 위험성에 대해 설명을 들은 적이 있나? 없다고? 우리는 이 공장의 공기 중에 법적 허용치의 30배가 넘는 코발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네편의 작품 중 가장 강렬한 것은 사회의 이면을 담았다는 점에서 <하드 메탈 증후군>의 연장선상에 있는 <의료보장제도: 돈과 생명의 거래>(1977). 미국 의료보장제도의 허점을 다룬 이 영상물에서 한 환자가 고장난 의료 기기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장면은,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자아낸다. 물론 아쉬움도 있다. “그땐 미숙했기 때문에 단순히 영상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내가 말하고 싶은 바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었다.”

인터뷰가 끝나가려는 찰나 “왜 위험한 곳을 찾아다니느냐”는 질문에 나지막했던 알퍼트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찍은 영상물을 통해 변해가는 이들을 목격하면서 그 중요성은 점점 커져갔다.” 그가 처음부터 투철한 사회적 책임감으로 무장한 채 이슈 메이커로 앞장섰던 것은 아니다. “<파파>를 보면 ‘아버지는 멈추지 말라고 가르쳤다’는 구절이 나온다. 아버지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상 일찍 포기하는 쪽이었다. 나는 공부를 잘하지도 못했고 똑똑하지도 않았다. 그것이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한편 나 자신도 실망시켰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가 아무것도 이룩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졌고, 스스로를 강하게 담금질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이 내면화돼 지금에 이르렀다.” 자신의 일에 대한 강한 집념과 애착. 그것은 그가 44년 동안 모험을 계속할 수 있었던 힘이고, 사회를 바로잡기 위한 그 모험에서 자신을 지탱해준 힘이다. 하얗게 머리가 세어가는 알퍼트가 여전히 모험을 포기하지 않으리라 믿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그가 인터뷰의 마지막에 들려줬던 따뜻하고 강한 집념과 애착의 말들 때문일 것이다.

DCTV는 무엇인가

존 알퍼트는 1972년 아내 쓰노 게이코와 함께 다운타운 커뮤니티 텔레비전 센터(DCTV)를 설립했다. DCTV는 영상물 제작은 물론, 교육 활동과 비디오 장비 대여까지 겸하고 있는 비영리 지역사회 미디어센터. DCTV에서 제작한 수백편의 다큐멘터리와 보도 영상물들은 현재 미국 내 여러 방송국과 캐나다, 일본 내의 주요 네트워크를 통해 방영되고 있다. DCTV의 활동에 대해 설명하던 알퍼트는 영상물 제작으로 인한 직접적 성과보다 교육 활동으로 인한 간접적 성과에 무게를 실었다. “DCTV는 다음 세대들을 위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DCTV에서 제공하고 있는 비디오 워크숍 등 교육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실제로 DCTV의 주활동 무대였던 차이나타운에는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이 거의 없지만, 우리를 통해 교육을 받은 아이들은 차근차근 자기 길을 밟아가 결국 대학 진학까지 하게 되더라. 그럴 땐 정말 뿌듯했다.”

DCTV의 출발점은 중고 우편물 트럭. 알퍼트와 쓰노는 TV를 설치한 중고 트럭을 몰고 다니며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트럭의 TV을 통해 길거리에서 상영되던 그의 비디오들은 조금씩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20여명이 함께 일하는 비교적 큰 단체로 변모한 DCTV는 다른 나라로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가고 있다. 알퍼트가 러시아에 머무르는 것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다. “현재 러시아의 미디어 활동가들을 미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노력 중이다.” 자동차를 매개체로 시작했기 때문일까. DCTV는 존 알퍼트만큼이나 쉬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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