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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의 제왕> <킹콩>의 웨타워크숍의 특수효과 강의 지상중계
박혜명 사진 서지형(스틸기사) 2006-07-26

기술이 아니라 상상력이 중요하다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챙겨본 관객 중 웨타의 이름이 낯설다 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피터 잭슨의 <반지의 제왕> <킹콩> 특수효과 작업으로 단박에 세계적 지명도를 얻은 뉴질랜드 특수효과 스튜디오 웨타워크숍이 한국을 방문했다. 방문단의 선두에는 리처드 테일러가 있다. 웨타워크숍 공동대표이자 피터 잭슨과 절친한 친구 사이인 리처드 테일러가 지난 7월14일부터 16일까지 3일간 한국의 영화학도들에게 특수효과에 관한 강의를 하고 갔다. 제1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1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던 이 자리를 지상중계한다.

DAY 1. 7월14일(금)

“상상력에는 한계도 경계도 없다”

“모든 것은 좋은 디자인에서 시작한다.”리처드 테일러의 첫날 수업은 이 말과 함께 시작됐다. 웨타워크숍은 특수분장, 특수모형 제작, 각종 소품 및 의상 제작, 세트 및 미니어처 제작 등의 일을 도맡은, 말하자면 ‘무엇이든 제작하고 보세요’가 슬로건인 곳이다. 미술(art direction), 프로덕션디자인(production design), 세트 및 소품(set decoration), 의상디자인(costume design), 분장파트(makeup department)가 모두 웨타워크숍의 작업 영역에 속한다. 이 수많은 작업들의 기본이 ‘좋은 디자인’이라고 리처드 테일러는 여러 번 강조했다. “이 자리에 온 사람들 중에는 그림이나 조각, 디자인 등 미술 관련 종사자들이나 전공 학생들도 있을 것이다. 당신들의 예술 작품이 전세계 사람들이 보는 갤러리에 걸리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첫날의 강의 주제는 ‘영화 디자인의 세계’. 영화 속 모든 미술 및 프로덕션디자인의 밑바탕이 되는 컨셉아트에 관한 것이었다. 리처드 테일러는 <킹콩>의 주인공 콩의 디자인을 최종 완성하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는 것, 이 영화에 쓰인 컨셉아트가 5천장에 달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강의에 동원된 영상 자료를 영사실에서 한 장면 한 장면 넘겨주고 있는 웨타 동료 롭 길리스에게 “고마워요, 롭”이라고 틈틈이 인사하던 친절한 선생님은 이토록 중요한 디자인이 수많은 개개인들의 협력에 의해 현실화된다는 것도 새삼스레 강조한다. 보고 듣기만 하는 이론 수업인 터라 첫날 강의는 다소 지루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리처드 테일러가 수업 마지막에 “내가 유머도 별로 없고 통역도 거쳐야 해서 많이 힘들었을 텐데 참아줘서 고맙다”며 150여명의 학생들 앞에서 미안한 웃음을 짓는다. 더러 졸기도 하던 학생들은 질의응답시간이 되자 눈을 빛내며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다. 관련 분야를 꿈꾸는 이들의 열정적인 질문과 이에 대한 자상하고 열정적인 선생님의 답변을 일부 옮긴다.

-<반지의 제왕>의 캐릭터 디자인들이 인상적이었다. 캐릭터를 창조하는 방법에 대해 듣고 싶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모방과 창조의 경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상상력에는 한계도 경계도 없다고 말하고 싶다. 한 사람의 상상력은 제한적일 수 있어도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각자 상상력을 발휘해 그것들을 한데 모은다면 우리 중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영화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기술을 보게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골룸은 기술적인 성취가 아니다. 우리는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생각한다. 앤디 서키스가 연기한 골룸 캐릭터에는 감정의 깊이가 존재한다.

-저예산 SF단편을 만들려고 하고 있다. 조언해달라. =꾸준히 연습하면서 뭔가 찾아내고 배우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하는 노력 자체에 가치를 두길 바란다. 피터 잭슨도 젊었을 적엔 자기 집 지하실에서 7천달러를 갖고 영화를 만들었다. 여기 오기 1주일 전에 한 감독과 미팅을 했는데, 그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디지털 효과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린 그에게 훨씬 저렴한 방식으로 미니어처를 제작해 보여주었다. 무엇을 이룰 것인가 하는 목표가 정해지면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많다는 걸 잊지 말라. 그리고 (강조하며) 절대 혼자 하지 마라. 협동해라. 당신은 감독이다. 깃발을 높이 들어라. 그걸 쫓아올 사람들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웨타워크숍에서 일하고 싶다. 조건이 뭔가. 나는 영어를 잘 못한다. =우리는 언어로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손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영어를 잘하면 의사소통이 더 쉽고 간단할 수는 있겠지만 정말 좋은 디자인은 언어를 넘어선다. 우리가 우선시하는 것은 열정(passion), 의욕(enthusiasm), 불굴의 의지(tenacity)다. 이 직업은 절대로 고상하거나 고급스럽지 않다. 밤 11시에 퇴근해서 새벽 2시에 출근해야 하는 직업이다. 그 짬에 잠을 잘 것인지 맥주바에서 버틸 것인지 날마다, 매주마다, 해마다 고민하는 직업이다.

DAY 2. 7월15일(토)

“간단한 트릭을 사용하면 돈과 장비가 문제되지 않는 효과를 만들 수 있다”

“돈과 장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둘쨋날 강의에서 리처드 테일러는 이렇게 말했다. 막상 그가 들려주는 사례들은 분명 돈과 장비가 문제되는 부분이었다. 예를 들어 <반지의 제왕> 3편의 대규모 전투신. 자그마치 70만명의 군사를 전부 컴퓨터 캐릭터로 만든 다음 개별 캐릭터에 각각 동작을 입력하고 인공지능을 부여했다고 한다. A와 B가 만났을 때 누가 이기고 질지는 자기들끼리 결정할 일이다. A가 창을 들고 공격하면 B는 방패로 막을 수도 있고 같이 창을 빼들 수도 있다. 점프하는 군인이 있는가 하면, 말에서 떨어지는 군인이 있다. 100% 인공지능 전투신이다. 또 다른 예. <킹콩>에서 해골섬 계곡을 소떼마냥 질주하는 브론토사우루스를 피해 주인공 일행은 죽어라 도망을 친다. 실제 배우들과 CG 공룡들이 합성된 장면이기도 한데, 피터 잭슨은 배우들을 핸드헬드로 촬영해놓은 터였다. “핸드헬드로 촬영한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해서 모션 컨트롤 정보로 읽어내기가 어렵다.” 그런데다 피터 잭슨 감독은 바닥에 이는 먼지구름, 공룡들 발에 짓눌리는 땅, 공룡들이 스치다가 뭉개버리는 나무들까지 표현해 달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반면 그의 말대로 “돈과 장비가 문제되지 않는” 효과들도 있다. <반지의 제왕>에서 소인족에 해당하는 호빗족 프로도와 거구인 간달프가 마주앉아 식사도 하고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프로도 역의 엘리야 우드와 간달프 역의 이안 매켈런은 같은 시간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고 카메라는 그들을 동시에 잡아냈다고 하는데, 영화 속에서 두 배우는 신체비율의 차이가 확연하다. 수평 위치에 놓인 두 사물과 카메라간의 거리 차를 이용한 간단한 촬영 트릭이라며, 리처드 테일러가 무대 위에서 시범을 보여준다. 두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신기한 광경이다. “우와아~.” 마술이라도 구경한 듯 학생들이 일제히 감탄사를 내뱉고 박수를 친다. 이날 수업에서는 모션 컨트롤 촬영 원리 및 모션 캡처 원리, 인공지능 컴퓨터와 CG 효과 등에 대한 자세한 강의가 이어졌다.

DAY 3. 7월16일(일)

<반지의 제왕> 속 ‘오크’의 귀환… 실제 현장에서는 최대 10시간 필요

셋쨋날 강의는 가장 흥미진진했다. 이날 리처드 테일러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한 오크 캐릭터의 분장 과정을 무대 위에서 시범을 보였다. 자원봉사자 중 한명이 ‘실험대상’으로 무대 위로 불려 올라가자, 손을 번쩍 든 몇몇 학생들은 아쉬워하는 눈치다. 남은 워크숍 일정을 소화해줄 또 다른 웨타 동료 빌 헌트가 리처드 테일러를 도왔다. 빌 헌트는 <반지의 제왕>에서 중간계 생물과 공간의 디자인 및 조각을 맡은 바 있다. 리처드 테일러와 빌 헌트가 실리콘으로 만든 오크족 피부를 실험자의 머리 위에 씌운다. 모든 보철물은 해당 배우의 얼굴을 주형으로 떠서 제작되는 맞춤형 소품이다. 대상자에게 씌워진 보철에 풀칠을 하던 리처드 테일러가 말한다. “지금 이분의 머리 크기가 원래 보철의 주인보다 훨씬 커서 보철을 맞추기가 쉽지 않네요.” 학생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진다. 통역기를 달지 않은 대상자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는지 눈만 꼭 감고 있다. 두명의 웨타 스탭은 인체에 해롭지 않은 풀을 이용해 뒤통수 보철과 얼굴 앞면 보철, 목 부분과 턱 부분을 섬세히 붙여 나갔다. 대상자의 두눈 주위를 보철색과 통일시키는 색 작업이 이어진 다음 오크족 가발이 씌워진다. 웨타워크숍의 수석 테크니션 롭 길리스가 오크족 갑옷을 입히고 나자 한 시간 반이 흘렀다. 이런 분장이 실제 현장에서는 5∼6시간에서 10시간씩 걸리는 것이 보통이라고 한다. 분장은 보통 밤에 시작해서 아침에 끝난다. “배우들은 잠이 들더라도 미술팀은 완벽하게 집중해야 한다. 실수하면 안 된다. 배우와의 신뢰가 한번 깨지면 그걸 다시 쌓기는 아주 어렵다”고 리처드 테일러가 덧붙인다. 무대 뒤에서는 <반지의 제왕>의 오크족 대장 캐릭터의 분장 과정이 영상으로 흐른다. 역할을 맡은 배우는 어느새 침까지 흘리며 졸고 있다. 이날 수업의 실험대상이 된 자원봉사자도 졸고 있다.

오크족 캐릭터가 완성되자 강의실 안이 흥분으로 휩싸인다. 머리 크기 차이 때문에 보철 형태가 좀 납작해지긴 했어도, 분명 <반지의 제왕>에서 오크 한놈이 갓 튀어나온 듯하다. 완성된 오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던 리처드 테일러는 “실제 촬영할 때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그 지역의 흙을 파내서 군복 위에 뿌린다. 전투 중에 땅을 수십번 뒹구는 군인들에게 리얼리티를 주기 위해서다”라고 설명을 덧붙이지만 학생들은 이미 저마다 디지털카메라를 꺼내들고 사진찍기 바쁘다. 사진기자들의 플래시도 분주히 터진다. 한 시간 반 만에 오크가 된 자원봉사자는 어깨가 으쓱해져 강의실을 누볐다.

리처드 테일러가 20여년에 걸쳐 쌓은 노력과 시도의 결과물을 전달하기에, 사흘짜리 강의는 매우 짧았다. 리처드 테일러 자신도 그렇게 말하기는 했지만, 그는 더 중요한 것을 학생들에게 남긴 듯했다. 보기 드문 열정과 이상, 현실감각과 추진력을 겸비한 뉴질랜드의 친절한 영화인은 웨타의 명성을 듣고 모인 학생들에게 교과서적으로 들리겠지만,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고 갔다. 리처드 테일러는 강의 중에 자주 여러 번, “내가 여러분 나이였을 때”, “내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의 실패담과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는 자신이 이룬 영화적 테크놀로지의 세계를 자랑하기에 앞서 학생들이 우러러보는 그 세계로 이르는 길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곤 했다. “학교에 가서 배워도 좋다. 다만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테크닉과 기술, 예술적 수완과 솜씨다. 당신만의 고유한 꿈과 목표를 추구하는 방법은 학교에서 가르쳐줄 수 없다.”

웨타워크숍은 리처드 테일러와 그의 아내이자 현 웨타워크숍 공동대표인 타냐 로저가 웰링턴의 작은 아파트에서 시작한 ‘RT Effects’에서 성장한 회사다. 리처드 테일러는 자기가 어렸을 때 플라스틱 인형 만들기를 좋아했고, 제 몸에 빨간 물감을 묻히고 죽는 시늉을 하며 엄마를 속이는 소년이었다고 스스로에 대해 소개했다. “지금 이 분장에 사용되는 붓은 여러분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다.” “3천원어치 종이와 비디오카메라만 갖고도 독창적인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 학생들의 눈높이와 사정을 그들만큼이나 이해하는 듯했던 리처드 테일러는 수업 뒤 몰려드는 질문에도 귀찮은 내색없이 일일이 답해줬다. 통역으로는 전달이 다 안 된다 싶었는지 연습장에 그림을 몇장이나 그려서 설명해주기도 했고, 명함을 건네주면서 “당신의 작업물을 사진으로 찍어서 내게 보내달라. 평가해보고 답장을 주겠다”고 약속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스팸메일도 워낙 많이 받아서 당신의 이메일을 실수로 지워버릴 수 있다. 답장이 늦으면 다시 보내보라”는 당부를 덧붙이며. 이 약속을 받아낸 한 대학생은 “내게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찾아오겠느냐”며 반드시 메일을 보낼 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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