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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을 보여드립니다
2001-09-06

`문화`로 음식을 다룬 프로그램들

식탁에서 진행자와 초대손님이 함께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거인들의 저녁식사>. 지인이 왔을 때 “밥이나 먹자”며 옷깃을 잡던 우리네 정을 살린 프로그램이다.

“오늘의 요리는 OOO인데요, 재료는 소고기 OO그램….”

하얀 앞치마를 입고 단정한 자세로 선 두 여자가 카메라를 응시하며 이런 말로 서두를 뗀다. 깔끔하게 정리된 주방에서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며 조리를 하다보면 10분 남짓한 시간에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요리가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오랫동안 보아온 이른바 ‘요리 프로그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요리나 음식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은 솔직히 드라마나 뉴스처럼 방송사가 많은 신경을 기울여 제작하는 주력 종목이 아니었다. 좀 심하게 말한다면 중요한 프로그램 사이에 편성돼 완급을 조절하는 ‘페이스 메이커’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러나 몇년 전부터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하더니, 최근 들어서는 구색 갖추기가 아닌, 독자적인 고정 시청자를 확보한 ‘힘센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고 있다.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 프로그램들은 냉정히 말해 과거에 우리가 보던 그런 요리 프로그램은 아니다. 음식 만드는 공정과 재료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이 아니라 그 음식이 갖고 있는 문화와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주체인 ‘식문화 프로그램’이라는 말이 정확하다.

음식 만들기, 그 자체가 쇼다

<맛있는 청혼>처럼 아예 요리와 요리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등장하고, <생방송 전국은 지금> 같은 전국 네트워크 프로그램이나 시골의 정서를 소개하는 향토 프로그램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것도 진기한 맛집이다. 하지만 최근 방송에 불고 있는 ‘식문화 프로그램’의 현주소를 아는 데는 지상파보다는 케이블방송을 살펴보는 것이 더 빠르다.

신생 케이블채널 <채널 F>는 요리와 음식문화를 전문으로 다루는 방송이다. 다른 채널처럼 가수들이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영화를 방송할 수도 없는 채널 특성상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방법이 별반 유별날 것이 없지만, 이 방송의 고정 시청자는 제법 많다. 아직 다른 채널에 비해 방송을 안하는 빈 시간대도 많고 재방, 삼방으로 이어지는 편성의 허점이 많지만 애초 예상보다는 훨씬 선전을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기존의 지상파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식문화 프로그램들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채널 F>도 전통적인 요리 프로그램의 포맷에 따라 사회자와 요리사가 등장해 음식을 만드는 프로그램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닥터 브라운의 요리수첩>이나 <퓨전 천국> <거인들의 저녁식사>와 같은 프로그램들은 음식을 소재로 해서 얼마든지 다양한 재미와 방법을 추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식탁 앞에서 말하는 것을 금기시하던 관습을 깨고 진행자와 초대손님이 함께 밥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거인들의 저녁식사>는 새롭게 시도하는 토크쇼이다. 이 프로그램은 지인이나 반가운 이가 왔을 때 “밥이나 먹자”며 옷깃을 잡던 우리네 특유의 살가운 정을 프로그램에서 살리려고 한다. 아직 초대손님들이 사회적 명망가 중심으로 꾸며져 피부에 와닿는 진솔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 못하고 딱딱한 분위기로 흐르는 것이 아쉽지만, 기존 토크쇼와 음식 프로그램의 접목을 시도한 새로운 시도는 지상파 방송에서도 주목을 하고 있다.

비록 우리가 만든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닥터 브라운의 요리수첩>과 <퓨전 천국>은 음식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쇼’이고 ‘오락’이라는 점을 일깨우고 있다.

‘사연이 있는 맛’ 소개

케이블TV에 비해 아직은 행보가 조심스러운 지상파 방송에서 주목할 만한 식문화 프로그램은 <맛기행, 그곳에 가면>이다. SBS에서 매주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오전 11시대와 오후 5시대에 방송하는 <맛기행, 그곳에 가면>은 한국적 ‘식도락 문화’의 가능성을 알아볼 수 있다. 방송시간으로 따지면 10분 안팎. 숨겨진 비장의 음식을 소개하거나 전국적으로 소문난 명가를 소개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구나 집 근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해 보이는 집들이 이 프로그램의 주요 대상이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의 호응은 무척 뜨겁다. 그날의 방송이 끝나면 곧바로 인터넷 게시판에는 방송에 등장했던 음식점에 대한 문의가 쏟아진다. 프로그램에 대한 시청자의 뜨거운 호응 때문에 방송사는 오전에 한번 더 같은 내용을 방송하고 있다. 예전에 <이홍렬쇼>에서 ‘참참참’을 진행할 때도 시청자의 호응이 뜨거웠지만, 그것은 음식과 스타의 토크가 가미된 일종의 ‘퓨전 형식’이었다. <…그곳에 가면>처럼 철저하게 음식만을 소재로 하는 프로그램이 호응이 높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음식이 지닌 사회적, 문화적 가치와 맛 자체를 소재로 삼는 이런 유의 프로그램은 일본에서는 ‘구르메 프로그램’이라고 부른다. 미식가 식도락가를 뜻하는 프랑스어의 ‘gourmet’에서 파생한 장르이다. ‘구르메 프로그램’은 식문화가 발달한 일본에서 벌써 10년 전부터 인기 장르로 자리잡고 있다. 특히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주말의 황금시간대라 할 수 있는 밤 10시대 이후에 편성된 프로그램 중 거의 절반 가까이가 음식을 주제로 하거나 이를 매개로 한 게임이나 토크쇼들이다. 이들 프로그램에서는 우리로 치면 신동엽이나 남희석, 유승준, 신화 등에 해당하는 연예인들이 진지한 표정으로 메밀국수를 삶거나 카레라이스를 만드느라 정신없는 모습이 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음식 하나하나 맛을 음미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일본 구르메 프로그램들은 특정한 정보에 대한 깊이있는 탐구나 맛에 대한 극한의 가치를 추구하는 경우가 많다. 유난히 음식에 대한 맛을 까다롭게 따지고, 외식문화가 발달한 그들답게 80년간 3대에 걸쳐 한자리에서 오뎅만 끓여온 가게 같은 그런 ‘맛의 달인’들을 주로 다룬다. 우리 ‘명작의 고향’ 같은 장엄한 내레이션과 유려한 화면으로 1시간 내내 찹쌀떡(모치)으로 유명한 고장을 소개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구르메 프로’, 식문화 프로그램은 그런 탐미적인 무한의 가치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곳에 가면>에 등장하는 음식에는 유별난 것이 없다. 요즘 인기 높은 퓨전 요리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예전 궁중에서나 먹던 귀한 음식을 선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진기한 재료를 쓴 것은 더더욱 아니다. ‘돈카스’, 된장찌개, 칼국수 등 우리네들이 어디서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음식들이다. 비록 제목에는 ‘맛기행’이라는 단서를 붙였지만, <…그곳에 가면>이 추구하는 것은 ‘사연이 있는 맛’, ‘의미를 담고 있는 음식’의 소개이다. 일본처럼 맛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는 그 음식에 숨어 있는 삶의 이야기를 함께 담는 것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10년간 함께 지켜온 된장찌개집이나 사업에 실패했던 부부가 마지막 기회라며 비장한 각오로 시작했던 칼국수집 등이 이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음식점이다. 그래서일까, 내용의 객관성을 살리기 위해 넣는 손님들의 반응도 한결같다. “마치 집에서 먹던 음식 같다.” 일본 구르메 프로그램이 집에서 맛볼 수 없는 진기한 맛을 찾는다면, 우리 시청자들은 집을 떠난 이들에게 어머니의 손길을 느끼게 하는 맛에 흐뭇함을 느끼는 것이다.

아직 우리의 식문화 프로그램은 현재진행형이다. 우리가 식도락과 미식을 있는 자의 사치가 아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즐거움으로 여긴지도 얼마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더더욱 한국적 식문화 프로그램의 가능성은 넓고 다양하다. 어떤 이야기와 정보가 담긴 맛을 앞으로 보여줄지, 입맛이 다져진다.

김재범/<스포츠투데이>기자 oldfield@sports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