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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영화를 사랑한 배우들 [3] - 양익준

나의 영화를 돌 위에 새긴다

<바라만 본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의 양익준

사진 촬영을 위해 준비해야 할 의상을 설명하던 기자는, 성인 남자 혹은 배우라면 가지고 있을 것이라 여겼던 양복 한벌, 가죽점퍼 하나가 없다는 그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옷장을 뒤져 준비했다는 의상을 입고 카메라 앞에 선 그가 이번에는 ‘깜찍한 표정으로 셀카를 찍는 귀여운 남자’라는 난해한 주문에 난감해한다. 그러나 이내 얼굴에는 장난기가 가득하다. 남들은 당연하게 지니고 있다는 옷 한벌 없이, 주어진 순간에 최선을 다하여 감동을 주는 배우 양익준의 진면모랄까. 10편에 이르는 단편영화, <강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등의 장편에 출연했고, <KBS 독립영화관> 진행자로 얼굴을 알린 그는, 지난해 미쟝센단편영화제에 세편의 출연작이 상영된 끝에 연기상을 수상했고, 올해는 출연작(<낙원>)과 연출작(<바라만 본다>)을 본선에 진출시켰다.

인터뷰를 위해 얼굴을 마주한 내내 그에게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의 용희와 정확하게 겹친다. 용희는 술자리의 잊고 싶은 기억을 들춰내며 인사를 건네고, 자신이 아는 모든 사람에게 사심없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남자로, 눈치없는 그 모습이 때로 부담스럽지만 의심할 수 없는 진심을 외면하기란 쉽지 않다. 인사를 주고받을 만큼만 양익준을 알고 지냈다는 손원평 감독은 “우연히 만날 때마다 때리면서 반가워하는, 아줌마스러운 모습(웃음)” 때문에 <인간적으로…>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를 떠올렸다고 말한다. 평범한 모자(母子)의 식사가 가슴저린 반전으로 치닫는 <햇살이 머무는 식탁>, 평범한 커플의 흔한 이별을 담은 <타임머신> 등의 단편도 마찬가지다. 그는 투정을 부리다가도 속깊은 소리를 내뱉는 아들이고, 연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사려깊은 남자였다.

정유미(<폴라로이드 작동법>), 김동영(<눈부신 하루> 중 <엄마찾아 삼만리>) 등 배우 발굴에 있어 남다른 감을 지닌 김종관 감독은 ‘평범하고 인간적인’ 배우 양익준의 또 다른 모습을 끌어냈다. 그의 최근작 <낙원>은 하룻밤을 함께 보낸 두 남녀가 다음날 아침 온 길을 되짚어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양익준은 대사 한마디없이 절뚝거리는 몸짓과 초췌한 수염, 무표정으로 일관한다. 선로를 사이에 둔 플랫폼에서 다시는 안 볼 듯 싸워대는 두 남자를 담은 미완성작을 통해 만난 양익준과 김종관 감독은 둘도 없는 친구가 됐다. 김종관 감독은 이 영화의 완성을 미루고 <낙원>을 구상하면서, “겉으로는 ‘하하호호’ 웃지만 조금 친해지면 쓸쓸한 모습이 보이는” 친구를 떠올렸다. 절제를 통해 감정의 원형을 전달하는 <낙원>과 “아무리 무표정해도 살아 있는 사람의 느낌을 주는 배우” 양익준은 쉽게 예상할 수 없지만 완벽한 조합이다.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은, 배우의 운명이고 한계. 양익준이 카메라 뒤에 서기로 결심한 것은, 그 수동적인 입장을 벗어나겠다는 특유의 의지가 작용한 결과다. 말 못할 첫사랑을 앞에 두고 의도하지 않게 고백을 해버린 딱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는 <바라만 본다>에서 그는 주연과 연출을 겸했다. 자신의 첫인상을 닮아 마냥 평범하고 착한 영화 같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그가 “설경구를 능가하는 에너지”(손원평)를 선보이는 클라이맥스에는 다른 사람의 영화에서 마음껏 보여줄 수 없었던 내면 연기가 담겨 있고, “사운드나 카메라가 조금 불완전해도 연기가 좋으면 오케이를 내리는, 연기자를 배려하는 연출”(김종관)이 끌어내는 진솔함이 영화를 빛나게 한다는 사실을.

단역으로 출연했던 <서브웨이 키즈 2002>의 손정일 감독이 그로 하여금 영화의 매력을 발견하도록 도왔다면, 막연했던 연출의지를 현실화한 것은 2004년 부산영화제 마스터클래스에서 만난 허우샤오시엔 감독이다. “생각하는 것은 물 위에 글을 쓰는 것이고 영화를 만드는 것은 돌 위에 새기는 것”이라는 거장의 말을 책상 앞에 붙여놓고 영화를 배웠던 양익준. 주변에선 ‘한국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돼라면서 부추기지만 정작 본인은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을 뿐이다. 술자리에서 배우가 되겠다 큰소리를 친 것을 계기로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이 배우는 올 가을 개봉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는 강동원의 어릴 적 친구로 비교적 중요한 역을 맡게 된 것보다 송해성 감독을 만난 것이 더 행복했다고 말한다. “배우가 아니었던 적이 없어서 연출과 연기를 한꺼번에 하는 게 그렇게 힘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연기만 해야 하는 위치가 되었을 때 연출 경험이 다소 위험하게 작용할까” 고민이 된다는 초보 연출자와 함께했던 몇 시간. 이는 결국 소박하고 겸손하되 고집스러운 인간미를 최대 매력으로 하는 그의 첫인상을 확인, 심화하는 자리였다.

필모그래피

장편-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강적> <아라한 장풍대작전> <해피 에로 크리스마스> <품행제로> 등

단편- <바라만 본다> <낙원> <인간적으로 정이 안 가는 인간> <햇살이 머무는 식탁> <철수야, 철수야 뭐하니?> <팡팡 퀴즈 쇼 커플 예선전> <타임머신> <서브웨이 키즈 200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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