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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기억할 말한 휴가
이종도 2006-08-04

휴가인데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집안은 귀곡산장처럼 뒤숭숭하고, 미래는 콜라 밑바닥으로 보는 세상처럼 불투명했다.

태풍이 몰아치기 전 뒷산에 올랐다. 유난히 까마귀떼가 시끄럽게 울었다. 놈들이 덮쳐서 눈이라도 파먹는 거 아닌가, 하는 두려움 때문에 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순간 최인호의 <개미의 탑>이 떠올랐다. 집안에 들끓는 개미에 시달리던 사람이, 마침내 욕조에 설탕 포대를 넣고 휘저은 다음 개미에게 몸을 내맡긴다는 얘기다. 24년 전 김정춘 생물 선생님이 말해줘 읽었다. 김정춘 선생님은 절대적인 존재였는데, 엄청난 성적 지식으로 무지한 우리를 절절매게 했기 때문이다. 이제 막 이부자리에 몽정을 하기 시작한 우리로서는 김정춘 선생님이 전하는 자연의 이치가 전율 자체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성인 여자로부터 전해 듣는 성적 진실. 선생님이 전해준 <개미의 탑>은 원작보다 훨씬 더 에로틱했고 무서웠고 신비로웠다. 까마귀의 울음소리가 24년 전 절절매던 몽정기의 나, 그리고 나를 절절매게 하던 김정춘 선생님을 만나게 해주었다.

연극을 오랜만에 보았다. 김성녀의 모노드라마 <벽 속의 요정>. 동란 때부터 40년간 부역 혐의로 집 안의 벽장에 숨어 지내던 아빠와 아빠를 벽장 속에 숨은 요정으로 알고 지낸 딸의 이야기다. 엄마가 집안을 먹여살리느라 계란 행상을 하는 대목. 김성녀가 광주리 하나를 들고 객석 앞으로 나왔다. 빈손을 그러쥐고 가짜 계란을 파니 관객이 당황해한다. 나한테 오면 어쩌지, 하는 즐거운 긴장. 계란을 받았으면 돈을 줘야 할 것 아니냐는 김성녀의 지청구에 남자 관객이 어쩔 줄을 모른다. 가짜 계란을 받았으니 가짜 돈을 주면 될 거 아니냐는 가르침에 관객이 하나둘 깨어나 연극 속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김성녀가 객석 가운데 앉은 중년 여성에게 계란을 팔겠다고 하더니 옆에 앉은 관객에게 가짜 계란을 전달시킨다. 사람들이 계란을 쥐고 옆에 건네주는 흉내를 낸다. 중년 여성이 값을 치른다. 김성녀가 돈을 받고 가만히 있자 중년 여성이 ‘거스름돈을 줘야지’ 하고 타박을 한다. 객석은 뒤집어진다. 가짜 속에 진짜가 있다는 이 놀라운 연극적 통찰을 어디 그냥 가만둘 수 있어야지. 나도 침대라는 무대에서 즉흥연극을 해봤다. 방종한 남편에 실망한 부인이, 피리 부는 계란 행상을 따라가 사랑의 바다에 빠져죽는다는 슬픈 내용이었다.

무료한 참에 고스톱이 보였다. 전날 연극을 같이 본 이에게 뜻을 물으니 하나도 모른다고 하기에, 가르쳐주마 했다. 예상대로 ‘학생’의 돈을 땄다. 고돌이에 청단 등등하여 한판에 2300원을 먹게 되었다. 기분이 너무 좋았다. 그런데 너무 좋아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뭔가 있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학생이 판돈을 다 치른 뒤에야 사실을 털어놓았다. 내가 ‘흔들었다’는 것이다. 아뿔싸, 2배였는데. 흔든 걸 잊었기 때문에 당황했던 것이었다. 그 판 이후로 내리 잃었다. 함께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하나도 몰라’라고? 음, 가증스러운. 아침에 모르는 데서 전화가 왔다. 오랫동안 쉬던 ‘학생’이 취직됐다는 전화면 얼마나 좋을까. 통화를 엿들으니 내 예상이 맞았다. 아싸! 너무 기분이 좋은데, 그걸 숨기기가 참 어려웠다. 콜라 밑바닥이 엷게나마 장밋빛을 띠었다. 기억할 만한 휴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