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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게드전기>의 원작자, 어슐라 K. 르귄의 작품세계
김현정 2006-08-04

판타지와 SF소설을 사랑하는 이들은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원작을 각색한 영화를 기다리게 될 것이다. 피와 살과 대지와 공기를 얻은 언어의 세계를 만나게 되리라는 설렘 혹은 혼자 간직해온 보물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같은 것들. 8월10일에 개봉하는 지브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게드전기>도 그처럼 기대와 걱정을 한꺼번에 안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적이 거의 없는 어슐라 K. 르귄의 원작을 선택한 이 애니메이션은 <어스시의 마법사> 세 번째 이야기인 <머나먼 바닷가>를 각색해 세상 끝에 닿아 있는 어스시의 세계를 우리 눈앞에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SF와 판타지 소설, 시와 동화, 100편이 넘는 단편을 써온 르귄은 어스시보다도 광활한 세계를 창조해왔다. 수백년을 전해내려온 듯 이끼와 돌벽의 느낌이 묻어나는 르귄의 소설들은 스스로 팽창한다는 우주처럼 끝없이 걸어갈수록 더욱 넓어지는 매혹적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어스시의 마법사>는 세상의 처음을 노래하는 <에아의 창조>의 한 구절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오직 침묵 속에 말이/ 오직 어둠 속에 빛이/ 오직 죽어감 속에 삶이 있네/ 텅 빈 하늘을 나는 매의 비행은 찬란하여라.” 이 노래와 이야기를 쓴 어슐라 K. 르 귄은 스스로 노래하였듯 침묵과 언어가, 어둠과 빛이, 죽음과 삶이 한데 뒤엉켜 세상과 사람을 빚어낸다고 들려주는 작가다. 그녀는 바벨탑에 드리운 언어와 마음의 장벽을 걷어내어 세계의 중심을 통찰한다. SF와 판타지를 주로 썼던 그녀가 미래보다는 머나먼 과거에서 건너온 전설을 전하는 이야기꾼처럼 느껴지는 이유도 그처럼 태고부터 존재해온 주제를 탐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뉴스위크>는 “르귄이 정말 하고 있는 일은 우화를 쓰는 것이다. 그녀는 인생과 죽음과 사랑과 섹스에 관한 매우 정교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를 쓴다”고 평가했다. 수천년이 지난 미래의 지구인이 폐허로 무너진 장벽에 서서 <도덕경>의 지혜를 마음에 새기고,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마법사가 자신과 마주해야만 한다고 바로 우리의 것인 가르침을 전하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 이야기들의 창조주인 르귄은 다만 포틀랜드의 자기 책상에 앉아서도 한번에 구만리를 간다는 붕(鵬)이 날갯짓하듯 홀로 광대한 세계를 여행해왔다.

드라마틱한 시간여행의 구축, 그 원천은 평탄한 삶

불행한 어린 시절은 때로 천재적인 작가를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르귄은 그와 정반대의 경우에 속하는 아이였다. 그녀의 부모는 북미 인디언 연구로 명성을 얻은 인류학자 앨프리드 L. 크로버와 심리학을 전공했지만 남편의 연구에 공명하여 <마지막 인디언>(Ishi in Two Worlds)을 쓴 작가 데오도라 크로버였다.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발견된 야히족 인디언 이시의 삶을 기록한 <마지막 인디언>은 부족의 마지막 생존자들이었던 어머니와 큰아버지와 사촌 누이마저 잃고 백인들의 박물관에서 유배자처럼 생을 마친 이시를 응시하는 책이었다. 인디언의 말을 모르는 백인 소녀를 보며, 사촌 누이에게 했듯 “단부사”(예쁘다)라고 중얼거리는 최후의 생존자. 세명의 오빠와 함께 담쟁이 덩굴 우거진 교수 사택에서 자라며 고독과 결핍이라고는 몰랐던 르귄이 외톨이들의 이야기를 쓸 수 있었던 까닭은 그처럼 직접 겪지 못했지만 많은 것들을 보고 들었던 어린 시절 덕분이었다. “읽고, 읽고, 읽는다”, “자리에 앉아 귀기울여 들을 준비를 한다”고 영감의 원천을 말하는 르귄은 매우 험한 삶이 그러하듯 매우 평탄한 삶도 작가를 잉태할 수 있다는 표본이 되었던 셈이다.

여름이면 나파 밸리에 있는 농장에 가서 인디언 ‘삼촌’들과 지내며 구전되어온 신화와 전설을 듣곤 했던 르귄은 대학에 진학하여 프랑스와 이탈리아 문학을 전공했고, 공부하러 갔던 파리에서 역사학자 찰스 르귄을 만나 결혼했다. 남편과 포틀랜드에 정착한 르귄은 이따금 떠나는 여행을 제외하면 그다지 변화가 없는 삶을 지속해오고 있지만, 그녀가 써낸 작품들은 하나의 세계가 형성되고 몰락하며 때로는 다른 세계와 조우하는 드라마틱한 시간여행을 해왔다. 가끔 잡지에 시(詩)가 실리기는 했어도 소설은 언제나 거절당했던 르귄은 서른두살이었던 1962년 <판타스틱>에 단편소설 <파리의 4월>을 개재하면서 작가로 데뷔했다. <파리의 4월>은 르귄의 다른 작품에 비해 아기자기한 이야기였지만, 낯선 세계에 추락한 이방인과 고독을 소재로 삼고 있어 이후 40년이 넘게 확장을 거듭하게 되는 작가의 출발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서로 다른 시대의 사람들이 마법으로 소환되어 중세의 파리에 모여 사는 이 이야기에서 소환의 키워드는 바로 고독이었다.

르귄의 SF를 관통하는 헤인 우주와 에큐멘 우주

열두살에 처음으로 잡지에 소설을 보냈던 르귄은 드디어 작가가 되었고 서로 맞물리며 매혹적인 패턴을 짜내는 소설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가 1964년에 발표한 단편 <샘레이의 목걸이>는 SF이면서 판타지였고 시간 속으로 사라진 이들에 관한 서글픈 전설이었다. 조상의 목걸이를 되찾기 위해 우주 공간에 머무르고 있는 우주선으로 잠깐 여행을 다녀온 영주의 아내 샘레이는 자신에게는 하룻밤에 불과했던 시간이 너무도 길어 남편은 죽고 어린 딸아이는 처녀로 자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소설을 쓰며 르귄은 드물게도 광속의 우주여행이 지니는 쓸쓸함과 어찌하지 못하는 고독을 바라보았다. 낯익은 모든 이들이 사라지고, 이국이나 다름없어진 고향에 남겨진 여행자. “판타지의 영웅들은 말을 달리면서 피로나 목마름을 느끼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는 르귄은 미래이자 과거의 신화인 이 소설에 터져버린 물집처럼 아프게 남는 인간의 상처 또한 담았다. 그 때문에 가공의 행성, 허구의 나라 앤기어는 지구의 대양 아래 가라앉은 전설의 대륙처럼 다가올 수 있었고, 르귄의 모든 소설이 또한 그러했다.

르귄이 좋아했던 북구 신화처럼 황혼의 쓸쓸함을 담고 있는 <샘레이의 목걸이>는 샘레이의 서러운 울음 끝에서 또 다른 세계를 향한 의문을 발견했다. 샘레이를 맞이했던 외계행성인 로캐넌이 그녀의 세계를 궁금해했던 것이다. 그리고 장편소설 <로캐넌의 세계>가 첫발자국이었던 헤인의 우주가 시작되었다. 아이작 아시모프와 J. R. R. 톨킨과 로저 젤라즈니처럼 뛰어난 SF와 판타지 작가들은 하나의 국가나 행성에 만족하지 못하고 기어이 세계를 창조하고야 마는 법이다. 그러나 르귄의 SF를 관통하는 헤인 우주와 그 계승자인 에큐멘 우주는 구체로 이루어진 완전무결한 세계가 아니다. 그보다는 외부의 조건을 차단하고 실험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유리 플라스크나 여러 개의 세계를 여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징검다리에 가깝다. 조각조각 흩어진 단서를 모아보면, 헤인은 고도의 문명을 가진 행성이었고 우주를 여행하며 다른 행성에 인력을 파견해 연맹을 형성했다. 그러나 은하에 흩뿌려진 헤인인은 통신수단을 발명하지 못해 결국 서로 연결이 끊어진 채 고립되고 말았다. <로캐넌의 세계> <환영의 도시> <유배행성> <빼앗긴 자들>은 그 시대의 이야기다. 그러나 아마도 수만년이 지나 나타난 에큐멘은 수십 광년을 넘어 실시간으로 교신하는 앤서블을 발명해 다시 한번 연맹을 이루었고 문화와 정신을 주고받고자 했다. 그리하여 <어둠의 왼손> 이후는 앤서블로 교신하는 에큐멘 우주 시대의 연대기가 되었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그리고 <도덕경>

미국인의 서부 개척 신화와 비슷한 남성적인 SF소설에 반감을 느꼈던 르귄은 “테크놀로지보다는 사회과학에 관심을 가졌고, 개방적이었던, 그래서 지금 또다시 그리워지는” 1960년대와 70년대 SF작가 세대의 일원이었다. 그녀는 헤인이 쇠락하고 연맹이 붕괴하면서 연맹을 형성했던 행성들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전제를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그것이 르귄을 SF로 이끈 요인이기도 했다. 자신의 SF소설을 사고실험이라고 불렀던 르귄은 “판타지나 먼 미래가 배경인 SF의 세계는 작가에 의해 고안된 것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무지개처럼 다양한 세상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자유가 판타지와 SF의 아름다움이다”라고 말했다. 자유가 넘실대는 르귄의 SF소설들은 현실을 빗대어 구축한 가상의 행성에 착륙하여 지금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는지 묻곤 한다. 그 실체가 무엇인지도 의심하지 않은 채 거대한 권력에 짓눌려 살고 있지 않은지, 부당하게 서로를 배척하고 있지 않은지, 우리의 유토피아는 어디에 있는지.

북미 인디언의 풍요로운 구전문화를 접하고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경계란 단지 사람의 마음에만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르귄은 <유배행성>에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종족이 새로운 피를 받아들여 회생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 이야기에서 행성 웨렐의 원주민은 스스로 사람이라 부르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외계인 또한 스스로를 사람이라 일컫는다. 서로 동등한 사람이라고 인정하지 못하던 두 종족은 젊은 남녀가 사랑에 빠진 다음에야 피를 섞고, 잃어버린 뿌리를 찾아 <환영의 도시>에 사절단을 파견하는 발전된 문명을 건설한다. 르귄의 걸작으로 꼽히는 <빼앗긴 자들>은 세월을 뛰어넘어 앤서블의 원리가 태동하는 시기를 다루고 있다. 쌍둥이 행성인 우라스와 아나레스는 오래전에 서로 다른 길을 택했다. 우라스의 빈부격차와 남녀차별에 반기를 들었던 혁명가의 이념 오도니즘을 추종하는 아나레스는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공동체를 건설하지만 고립되어 한계에 부딪치고, 자본주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우라스의 기운을 얻고자 이론물리학자 쉐벡을 보낸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지난 세기 사회주의자들이 꿈꾸었던 유토피아를 대비시킨 이 소설의 원제는 <The Dipossessed: An Ambiguous Utopia>다.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과 굿맨의 영향을 받은 르귄은 아나레스에 조금 더 마음이 간다고 말하면서도 어느 행성이 유토피아인지, 부제처럼 모호한 상태로 놓아두었다. 그녀에게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의 뒷모습이 아니었다. 우라스와 아나레스는 모두 유토피아이자 디스토피아이고, 선택하는 자가 품고 있는 소망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르귄은 어릴 적에 아버지 책꽂이에서 처음 보았던 <도덕경>을 탐독해 이처럼 서구인으로 보기 드물게 이분법에 휘둘리지 않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었다(르귄은 <도덕경>의 역자이기도 하다).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에도 나타나 있는 도가의 영향은 <환영의 도시>에 좀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책에서 다른 세계를 꿈꾸는 지구인들은 <도덕경>을 경전으로 간직하고 있다. “길로 갈 수 있는 길은 영원한 길이 아니며 이름 붙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니”라는 <도덕경>의 경구는 주인공 팔크가 지워진 자아를 깨우기 위해 기억해두는 열쇠이다. 정체불명의 ‘적’에 의해 한번 마음이 없는 텅 빈 존재가 되었고, 과거를 회복하기 위해 몇년 사이 새롭게 형성된 자아를 다시금 지워야 했던 팔크는, 두명의 자아를 하나의 마음에 간직한 채 새로운 우주가 형성되는 실마리를 붙잡는 것이다. 세상 그 무엇을 빛과 그림자로 나눌 수 있겠는가. 르귄은 고대의 지혜를 일깨우며 미래의 신화를 건설해간다.

“판타지는 영혼의 여행, 영혼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투쟁”

그녀의 또 다른 걸작인 <어둠의 왼손>도 타고난 상상력만으로는 실험해보기 힘들었을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에큐멘의 ‘엔보이’(사절) 겐리 아이는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행성 게센과 조약을 맺기 위해 파견되었다. 그는 일년 중 일정 기간은 여성으로, 나머지 기간은 남성으로 지내는 게센인의 생체적인 조건을 보며 현기증에 가까운 혼란을 느끼곤 한다. 페미니스트의 환영을 받은 동시에 ‘He’라는 대명사를 사용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던 <어둠의 왼손>은 성차의 본질에 관해 의문을 품게 하는 소설이다. “빛은 어둠의 왼손/ 그리고 어둠은 빛의 오른손/ 둘은 하나, 삶과 죽음은/ 케머 연인처럼/ 함께 누워 있다/ 마주 잡은 두 손처럼/ 목적과 과정처럼” 르 귄은 고정된 이상향을 거부했듯 못박힌 성차 또한 부정한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인 존재를 꿈꾸는 <어둠의 왼손>은 겐리 아이가 기록한 게센의 민담과 옛 지혜를 액자처럼 삽입한 형식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중 하나는 아이를 낳은 다음에는 헤어졌어야 하지만 그 규칙을 지키지 못했던 연인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다. 근친상간을 저지른 형은 자살하고, 동생은 빙원을 헤매고, 형제이자 연인을 내쫓은 고향은 불모의 저주에 고통받는다. 숱한 세월이 흐른 뒤에 나그네로부터 고향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동생은 “그들에게 내가 나의 이름과 나의 그림자를 되찾았다고 전하라”고 말한다. 이 민담은 생사의 경계를 넘어 자신의 그림자와 마주하고서야 온전한 자아를 이루는 <어스시의 마법사>의 게드와 겹치는 부분이다.

르귄은 “판타지는 영혼의 여행이며 영혼 안에 공존하는 선과 악의 투쟁”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헤인 우주보다는 견고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어스시의 마법사> 시리즈는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여행자의 이야기이고, 어둠과 싸우는 전사의 이야기일 것이다. 마법사 게드는 헤인과 에큐멘 우주를 떠돌아다니는 항해자처럼 완전히 낯선 세계에 던져진 외톨이는 아니지만, 홀로 그 싸움을 감당해야만 하는, 여전히 고독한 존재이다. 그리고 게드와 그의 후계자들은 전투의 끝에서 이승과 저승, 빛과 어둠을 가르는 경계를 넘어 합일을 찾아낸다. 르귄은 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에 수록된 <물건들>의 서문을 “세상에는 심연이, 갈라진 틈이, 맨 마지막으로 걸어야 할 걸음이 존재한다”는 문장으로 끝맺었다.

르귄의 소설은 ‘행하지 않음으로써 행하는 무위’

땅(earth)과 바다(sea)를 더한 단어인 어스시는 동서남북으로 트인 원해와 숱한 섬들로 이루어진 가상의 세계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진정한 이름을 아는 이에게 지배당하는 탓에 이름을 숨기고 살고, 게드 또한 새매라는 이름으로 작은 섬 곤트에서 성장한다. 마법의 재능을 타고난 게드는 수련을 받기 위해 고향을 떠나지만 거만한 동료의 충동으로 죽은 영혼을 소환하는 금기의 마법을 행사해 어둠의 존재를 불러내고 만다. 검은 얼굴에 하얀 흉터가 남은 게드는 이제 자신을 회복하고 살아남기 위해 먼바다로 떠나야만 한다. <어스시의 마법사>가 언어학자와 기호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이 세계의 가장 강력한 마법이 진정한 이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자만이 그 이름을 알 수 있고, 그 이름을 아는 자만이 진정한 존재를 호명할 수 있다. 미카엘 엔데의 <끝없는 이야기>가 새로운 이름을 얻어 죽어가는 세계를 되살리고자 하는 모험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르 귄은 이것이 <황금가지>에서도 찾아내었던 고대 문화의 일부일 뿐이라고 말한다. 거기엔 수많은 해석과 설명이 따라붙을 수 있겠지만, <어스시의 마법사>는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이야기이고, 자신을 쏟아부으며 공감하게되는 험난한 성장담이다.

고대 서사시 <길가메시>처럼 불완전한 영웅의 모험담인 <어스시의 마법사>는 게드를 조연으로 거느리고 <아투안의 무덤> <머나먼 바닷가> <테하누> 등으로 이어지면서 여섯권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연대기로 계속되었다. 금기를 어기고 스승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게드의 자책, 어둠에 갇혀 있다가 스스로 빛을 향해 걸어나온 <아투안의 무덤>의 테나르의 결단, 마법이 사라져가는 세계를 지켜야만 하는 <머나먼 바닷가>의 아렌의 두려움. 현실의 우리가 겪고 있는 감정과 고난과 통과의례가 그 안에 있다. 그 때문에 어스시 시리즈는 책임이라는 문제를 좀더 분명하게 제기한다. 르귄은 “판타지 소설은 많은 부분 권력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상상할 수 없다면, 혹은 상상하려 하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그리고 책임감있게 행동할 수 없다”고 말했다. 미미한 힘을 지닌 이의 조그만 손짓 하나가 세상에 어떤 풍파를 불러올 것인가. 르귄의 SF와 닮았으면서도 다른 색채를 지닌 판타지 소설들은 자아를 완성해야 하는 동시에 그 자아가 세계에 끼칠 영향을 책임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태피스트리처럼 아름다운 무늬를 간직한 옛이야기로 전해주곤 한다.

기독교와 이슬람 근본주의에 분노하고 고대 사상을 짓밟은 중국의 문화혁명을 공격하는 르귄은 헤인과 에큐멘 우주의 암흑, 어스시의 대양으로 우리 세계의 그림자를 반사하는 작가다. 그러나 르귄은 부당한 모든 것을 향한 자신의 분노를 독자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헤인과 에큐멘과 어스시의 사람들은 하나의 선택을 할 때마다 변화를 맞고, 그 변화는 또 다른 선택으로 이어지며,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길목에 이른다. 다만 판단은 내리지 않는다. 마법의 힘을 잃어버린 게드가 이전보다 불행하고 무용한 이가 되었는지, 우라스와 아나레스가 선조들의 꿈에 좀더 가까워질 것인지, 르귄 자신도 알지 못한다. 그녀는 “행하지 않음으로써 행하는(doing by not doing) 무위(無爲)”를 자신의 소설에도 적용시키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을 만들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그곳에 있었다. 내 일은 그곳에 도착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헤인과 어스시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

어슐라 K. 르귄이 말하는 글쓰기 방법

이야기가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둬라

살만 루시디의 동화 <하룬과 이야기 바다>에는 이야기를 공급하는 수도관과 그 수원인 이야기 바다가 등장한다. 만약 그런 바다가 존재한다면 어슐라 K. 르귄은 가장 굵은 수도관을 차지하고 있는 작가 중 하나일 것이다. 그처럼 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왔다고 믿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세계와 우주를 창조한 그녀에게 사람들은 “르귄 선생님, 당신은 어디에서 글의 소재를 얻습니까?”라고 묻곤 한다고 한다. 르귄은 그 질문에 “당연한 말이지만, 까맣게 잊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과 도로 표지판을 거꾸로 읽으며 얻는다. 그 밖에 달리 어디가 있겠는가?”라고 답했다(단편집 <바람의 열두 방향> 중에서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서문). 그러나 르귄은 그것 말고도 비결을 지니고 있다. 그녀가 말하는 글쓰기의 경구들이다.

-모든 것이 당신 자신의 내면으로 가라앉아 어둠 속에 머물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어쩌면 몇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전혀 새로운 무언가가 그 풍성한 어둠으로부터 떠오를 것이다. 이것은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사람들은 신기한 것들을 좋아한다. 먼저 다른 것, 무언가 신기한 것을 창조하라. 그리고 사람의 감정이 격렬한 호를 그리며 도약하도록 하고, 그렇게 도약하여 생긴 틈을 메워야 한다.

-냄비요리나 질항아리를 만들다보면 통제하기보다 그저 내버려두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레시피가 정확한지, 언제 한련의 잎을 따야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나는 경험과 운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나이를 먹을수록 글쓰기를 통제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야기가 스스로 말하도록 내버려두어라. 그렇게 한다면 이야기는 자신의 길을 찾아내 앞으로 나아갈 것이고, 계획했던 것보다 나은 결과를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작업이 막히면 또 다른 작업을 하곤 한다. 소재가 고갈되는 시기엔 흥미로운 무언가, 배우고 싶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830년대 프랑스 혁명처럼. 나는 단지 좋아했기 때문에 몇년 동안 혁명에 관해 읽었고, 다시 몇년 동안 꿈의 분석에 관해 읽었고, 몇년 동안은 유토피아에 관해 읽기도 했다. 그 모든 지식은 결국 소설이 되었다.

-나의 세계는 고안되었다기보다 발견되었다. 나는 응시하고, 무언가를 바라본다. 어쩌면 풍경 속의 누군가를 말이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내야만 한다.

어슐라 K. 르귄의 어린이책

아이들의 상상력으로 통하는 또 하나의 세계

어슐라 K. 르귄은 판타지가 아이들을 위한 장르라고 생각하는 편견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판타지와 아동문학은 같은 장르가 아니고, 가벼운 장르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어린아이들은 도덕적으로 책임을 지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상상력은 책임을 지고 다른 이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훈련받아야 한다”. 르귄은 모두 열한권의 어린이책을 써서 그 훈련에 동참했다. 그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책은 <날개달린 고양이>(Catwings) 시리즈다. 길고양이 제인 태비 여사는 날개달린 새끼고양이 델마와 로저, 제임스, 해리엇을 낳아 키우고 있다. 그들에게 도시는 너무나 위험하고 먹을 것을 구하기도 어려운 장소다. 제인 여사는 아이들이 도시를 떠나 미지의 세계로 향하기 위해 날개를 달고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끼 고양이들은 보도블록을 박차고 날아올라 온갖 위험과 적이 기다리고 있는 숲으로 향한다. 낯선 세계에 던져진 아이라는 주제를 다루어 르귄의 판타지와 SF를 떠올리게 하는 <날개달린 고양이> 시리즈는 계속해서 후속작을 낳으며 4편까지 이어졌다. 단순하고 선명한 색채의 삽화가 아름다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미줄>은 국내에도 번역되어 있다. 웹스터 가문에서 태어난 꼬마거미 리스는 대대로 전해내려온 거미줄의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자기가 살고 있는 버려진 궁전의 벽화와 장식을 본떠 줄을 잣기 시작한다. 궁전을 박물관으로 만들기 위해 몰려온 사람들은 리스의 거미줄을 보고 감탄하지만, 리스는 궁 밖으로 쫓겨난 다음에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미줄을 만드는 방법을 알게 된다. 르귄은 “아이들을 위한 글쓰기가 단순하다면, 아이들을 키우는 일도 단순할 거다”라고 말했다. 간결하지만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그녀의 &#51686;은 이야기들은 아이들 또한 하나의 세계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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