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이창] 사랑과 이별의 그래프
권리(소설가) 2006-08-11

사랑이 떠나갔다. 영원할 것만 같았고 사랑한다 말해주었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이 좋다던 그 사람은 말했다. “콩깍지가 벗겨졌어.”

오호!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에 대해 이만큼 적절한 답변을 들은 적이 없다.

행복했던 일들이 다 오랜 기억처럼 느껴진다. 유치환 시인의 ‘행복’의 한 구절처럼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보이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편지를 쓴 게 어제 같은데, 이젠 아침에 눈 뜨고 밤에 눈 감는 일이 힘들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직업병 탓일까. 난 슬픔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언젠간 소설로 형상화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하며 그 사랑을 타자화해버린다. 타자화된 기억은 상실된 기억과 다름없다. 거기엔 어떤 감정이나 소요, 설렘도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와 거의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었다. 단지 80분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와 우정을 나누는 파출부 여성과 그 아들의 착한 이야기다. 박사의 기억상실증 덕에 파출부와 그는 늘 일관된 사랑을 나눈다. 전화번호가 뭔가? 아들이 있었던가? 늘 똑같은 질문을 들으면서도 여자는 전혀 지친 기색 없이 박사를 대한다. 기억을 공유할 수 없는 두 사람이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까? 미스터리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는 데는 어떤 ‘수식’이 존재했다. 박사가 사랑한 그 공식은 ‘e^πi+1=0’라는 오일러 공식이었다. 1을 더하면 0이 돼버리는 이상한 세계. 수학자들은 그것을 아름답다고 표현한다. 나는 박사가 본 세계가 어떤 것이었을까 상상하며 영화를 보았다. 무한하고 알쏭달쏭한 수의 조합이 그냥 0으로 끝나고 마는 수식의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말이다.

박사는 말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고. 나는 그 말을 ‘사람들은 저마다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말로 치환했다. 그리고 사랑의 과정을 머릿속에서 그래프로 그려보았다. 가령 ‘y=-/cos x -2/’의 그래프 말이다. 위로 뾰족한 산 모양의 그림처럼 사랑은 일회적인 것일까? 난 오히려 사랑이 ‘y=cos x’ 그래프처럼 상승과 하강의 파동주기를 반복한다고 생각한다. 호감, 애정, 절정, 권태, 실망의 과정이 마치 한 덩어리처럼 뭉쳐 순환하는 것. 끝없는 변화와 반복 속에 사랑은 유지되거나 혹은 소멸된다. ‘사랑해’라는 말에는 사랑의 총량이 담겨져 있지 않으므로 단지 사랑의 정도가 어느 정도로 변화되는지 감지되지 않는다. 그래서 난 상승기와 하강기에 들었던 ‘사랑해’라는 말에 담긴 사랑의 총량을 같은 것으로 오해했고 변화된 상대의 모습에 당황하고 말았다. 사랑이 변화무쌍한 것임을 목도하면서도 그것이 왜 그토록 변덕스러운 것인지에 관해 그저 인간의 생태적인 이유밖에 댈 수 없는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에 반해 이별은 사랑의 과정만큼 복잡다단하게 보이지 않는 듯하다. 싫증났든, 배신당했든, 오해했든, 상황이 맞지 않았든 이유야 수십 가지를 댈 수 있겠지만, 이별은 ‘끝’, 수로 표현하면 ‘0’인 상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마음을 다치고 몸으로 방어할 수 없고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절대고독의 상태를 맛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단지 둘이 아닌 상황으로 변했을 뿐, 이별하는 자아 역시 자기 안에서 다종다양한 그래프를 그린다. 함께 걷던 길, 함께 먹은 음식, 함께 찍은 사진, 함께했던 그 모든 일들을 눈물로써 그려낸다. 빗물에 따라 주르륵 눈물이 흘러버리는 감상적인 순간에서 그의 물건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그 과정은 계속된다. 예전 사랑이 남기고 간 기억의 총량만큼 궤적을 그리고 나면 이별의 그래프는 완전히 소강된다. 사랑에 1을 더해 0이 되는 순간만큼 오묘한 이때야말로 새로운 사랑이 다시 자신을 흔들어놓을 시기다. 이때의 0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의 0과는 또 다른 의미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기억이 그 사랑과 이별의 그래프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바보 같아 보이지만, 실은 인체가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다. 눈은 많은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