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칼럼 > 이창
[이창] 어둠의 광명 혹은 비명

##어둠1. 게이(여기서는 남성 동성애자)는 서울쥐다. 도시의 공기는, 익명의 공간은 그들에게 자유를 허한다. 혹시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순간에 익명은 그들을 감싼다. 게이바에 들어가는 순간, 게이바 옆 가게 주인이 그들을 본다고 해도 주인은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정말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엄마의 친구가 가게 주인인 동네의 게이바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면, 정말로 끔찍한 일이다. 더구나 게이바에서 옆집 아저씨를 만난다면, 정말로 당혹할 일이다. 이렇게 도시의 공기는 그들을 자유롭게 만든다. 아직도 서울의 게이바는 후미진 뒷골목, 어두운 거리에 늘어서 있다. 그리고 게이바 앞에는 종종 하수도가 흐른다. 도시의 쥐들이 시궁창의 어둠에서 이동할 자유를 누리듯, 서울의 게이들은 어둑한 종로의 뒷골목에서 활보할 자유를 찾는다. 그 어둠 속에서라야 초로의 사내들은 후줄근한 양복 소매 사이로 슬며시 서로의 손을 맞잡을 용기를 얻는다.

##어둠2. 어느 날 어둑한 종로의 뒷골목에서 악다구니가 들렸다. 초로의 사내는 묵묵히 수모를 감당하고 있었다. 깡마른 여인은 사내의 멱살을 휘어잡고, 아니 힘없이 멱살에 매달려 악을 쓰고 있었다. “미친놈, 내가 다시는 가지 말랬지!” 사내는 말이 없었지만, 사내의 어깨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아마도 게이바에서 부인에게 잡혀나온 남편인가, 짐작했다. 하필이면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멱살잡이를 당하는 사내도, 멱살잡이를 하는 여인도 힘없이 쓰러져서 흙탕물에 젖었다. 아마도 아내가 남편을 끌고 나왔을 게이바 ‘동행’에서는 비명 같은 노래가 들렸다. “누가 나와 같이 함께 따뜻한 동행이 될까.” 이렇게 피해자의 비명은 날카로운데 가해자의 해명도 구슬픈 사연이 있다. 누구에게도 책임을 묻기 힘든 불행이 세상에는 존재한다. 어느 날이 지난 어느 날, TV에서 오프라 윈프리는 “미국에만 게이 남편을 둔 부인이 200만명이 넘는다”고 말한다. 오프라는 어떤 게이를 앉혀놓고 “왜 결혼을 했느냐”고 따진다. 그는 설명하려 애쓰지만 설명하지 못한다. 그들의 비명은 어둠에 갇혔다.

##어둠3. 세상이 조금 더 어두웠다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조금 더 너그러웠을까? 그는 어둠 속에서 누군가를 만난 적이 있다. 어둠 속에서 그에게 끌렸고, 어둠 덕에 그도 호감을 가졌다. 어둠은 그들을 만나게 만들었지만, 이제 어둠은 그들에게 장애물이다.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려 애쓴다는 낌새를 들키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려 애쓴다. 이렇게 어둠은 그들의 까다로운 심사에 위안을 주었으나 그들의 호기심어린 마음에 근심을 드리웠다. 그들은 서로를 확인하는 모험을 주저하다 서로에게 미련을 남기고 헤어진다. 불행히도 어느 날 우연히 밝은 조명 아래서 서로를 스친다. 차라리 세상에 어렴풋한 어둠만 있었더라면, 우리가 더이상 밝음을 몰랐더라면, 미련없이 그를 사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세상이 30% 더 어둡다면, 사람을 30% 더 사랑할까. 우리의 사랑은 어떻게 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