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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하고 듣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
2001-09-07

개막작 <더스트>(Dust) 밀초 만체프스키 감독과 제작진 인터뷰

94년 <비포 더 레인>으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은 밀초 만체프스키 감독이 7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차기작을 위해 7년을 기다렸고, 베니스는 그를 7년이나 기다렸다. 만체프스키는 오스카를 비롯한 30여개 영화제에 불려다니며 바쁜 한철을 보낸 뒤에 할리우드의 구애를 받아들여 몇몇 메이저 프로젝트에 착수했으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했다. 오랜 침묵 끝의 결단은 모국 마케도니아로 돌아가는 것. 그의 신작 <더스트>는 100년 전 마케도니아로 공간 이동한 서부영화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 침략자와 혁명가, 약탈자들이 뒤엉킨 100년 전 발칸반도의 풍광에서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치열함과 낭만을 발견한 감독은, ‘발칸 웨스턴’ 또는 ‘이스턴’ 장르를 만들어냈다고 말한다.

21세기 초 뉴욕의 뒷골목에서 20세기 마케도니아를 이야기하는 전개 방식은 내러티브의 파편을 모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전작 <비포 더 레인>과도 닮아 있다. 21세기 초 뉴욕의 뒷골목, 좀도둑을 생포한 노파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면 금화를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노파는 20세기 초 오클라호마에서 명성을 떨친 총잡이 루크(데이비드 워넴)와 엘리야(조셉 파인즈) 형제 그리고 릴리스(앤 브로세)가 엮어간 비운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릴리스는 엘리야를 선택하고, 상심한 루크는 황금을 찾아 마케도니아에 건너가 무장 갱단에 합류한다. 루크는 그곳에서 터키 군대와 마케도니아의 민간 독립군들을 만나고, 임신한 채 홀로 남은 독립군의 아내를 보호하기 위해 유혈전에 뛰어들게 된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좀도둑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노파의 이야기에 중독되고, 숨을 거둔 노파가 못다 한 이야기를 직접 마무리한다. 노파와 형제의 관계가 무엇이었는지, 진실이 무엇인지는 끝내 알 수 없다. 역사가 승리한 자의 기록이듯, 기억 역시 존재하는 자의 것이기 때문에.

개막작 <더스트>의 기자회견장에는 작품 자체보다는 마케도니아의 정치적 상황과 그에 대한 감독의 입장, 조셉 파인즈가 영화제에 불참한 이유를 묻는 질문이 튀어나왔고, 감독은 거의 모든 질문에 뚱한 얼굴로 짧은 답을 던져주는 데 그쳤다.

20세기 초의 마케도니아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영국 여행가가 마케도니아는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그건 사실과 다르다. 마케도니아의 지난날을 이야기함으로써 시간을 이루는 요소들과 시간이 변화시키는 모든 것들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시간의 영향력은 캐릭터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당신은 본래 서부영화 팬이었나.

<더스트>는 서부영화이기 이전에, 이야기를 하고 듣고 만드는 것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다룬 영화다. 내가 생각한 포인트는 그것이다. 미국 서부 개척시대의 어떤 신화적인 모멘트가 마케도니아에도 있었는데, 그게 20세기 초였다. 다른 누구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고 개척하겠다는 갈망도 비슷했다. 12살 때 나는 서부영화의 팬이었지만, 이젠 나이를 먹었고, 뭔가 다른 얘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케도니아의 현재 상황에 대해 나토 등의 서구가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나는 영화 속에서 마케도니아의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너댓명의 인물 각자에게 일어난 일을 다룬 것이다. 지금의 상황이나 서구의 책임에 대해 뭐라고 언급하기는 힘들다.

20세기 초는 영화가 태동하고 발전한 시기다. 극의 시대적 배경과 초창기 무성영화의 형식을 차용한 대목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영화 만들기에 대한 오마주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마주나 레퍼런스에 대한 얘기는 굳이 하지 않으려 한다. 스파게티 웨스턴도 마찬가지다. 굳이 어떤 영향을 받았다면, 존 웨인이나 클린트 이스트우드보다는 밀로스 포먼과 마틴 스코시즈라고 말하고 싶다.

영화제작에 어려움은 없었는지.

(프로듀서 크리스 오티) 상당히 고된 작업이었지만, 즐거웠다. 판타스틱한 아이러니라고 할까. 촬영을 시작한 뒤에도 세르비아의 정치적인 문제로 한동안 중단했었다. 마케도니아는 발칸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폭풍의 핵심이다. 촬영을 지속하고 마치는 과정이 힘들었지만, 의미는 있었다.

(배우 앤 브로세) 처음 공항에 도착했을 때,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모두 그것을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서 무척 놀랐다. 고립된 공간에서의 외로움과 비애는 자연스레 영화에 녹아들 수 있었다.

민감한 사안을 다루고 있는데, 합작 과정에서 조율의 어려움은 없었는지.

(크리스 오티) 이건 리얼리즘영화가 아니다. 당신이 더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당신의 목소리는 어디로 가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건 방법이나 선택의 문제다. 우리 모두는 역사를, 개인사를 지어낸다. 상대에 따라 버전도 달라진다. 그건 정치에도 사생활에도 적용되는 얘기다. 20세기 초 발칸의 상황, 폭력과 복수라는 위험한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모럴을 둘러싼 두 형제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경을 인용한 보편적인 이야기로도 볼 수 있다.

베니스=박은영 기자▶ 바다위에 피어난 국경없는 시네마 파라디소

▶ “이야기를 하고 듣는 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