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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태풍맨과 블루맨
권리(소설가) 2006-08-25

지나친 의미 부여는 정신 건강에 해롭다(써놓고 보니 담뱃갑의 경고문구 같다). 의미 부여가 착각의 늪으로 가는 최단거리란 건 수학적 증명을 거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건만, 난 자주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의미 부여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하나만 더 실수를 저질러볼 수 있는 영광이 주어진다면, 난 내 동생과 함께 있을 때마다 이상한 일을 자주 겪는다는 사실을 고백할 테다. 인정하긴 싫지만, 우리는 붙어 있으면 서로에게 비의도적인 민폐를 끼치는 ‘덤 앤 더머 시스터스’다.

지난해에 동생과 함께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을 때의 일이다. 보고 싶었던 영화가 매진 행렬을 하고 있는 모습에 한 줄기 눈물을 흘리고 있던 우리 앞에 일명 ‘태풍맨’이 나타났다.

“아가씨들, <태풍> 안 봐요?”

야구 모자에 헝클어진 단발머리, 제멋대로 난 수염과 불룩한 배. 출처를 알 수 없는 남자의 출현에 우리는 좀 당황하고 말았다. <태풍>은 어디까지나 2순위였기에 우린 좀 시큰둥했지만, 단발머리 남자는 우리에게 티켓을 두장 안기고 사라져버렸다. 동생은 티켓을 뒤집어보며 말했다.

“가짜 아냐?”

그러나 티켓은 멀쩡했다. 우리의 밑도 끝도 없는 추리는 거기서부터 시작됐다. 영화사 알바, 단순한 변심자,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급하게 돌아가야 하는 사람, 좋아하는 여자한테 바람 맞은 사람, 심지어 날개 잃은 천사란 말까지 나왔다. 무사히 극장 안으로 들어가서도 우리는 자리에 혹시 폭탄이 설치되었거나 페인트칠이 되었는지 유심히 살폈다. 엉뚱한 추리는 영화를 보면서 점차 공포물로 변해갔다. 다행히 태풍맨이 우리 뒤에 와서 목을 긋고 사라지거나 목을 조르는 불상사는 발생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는 ‘블루맨’ 사건도 있었다. 그날 우리 자매는 모처럼 쇼핑을 하고 역 플랫폼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한 시선이 느껴졌다. 빛바랜 파란 면 티셔츠를 입은 남자가 음흉한 눈으로 날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평소와 달리 가슴이 약간 팬 옷을 입고 있어서일까? 머릿속으로 나와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고 굳게 믿어왔던 한 단어가 사자후처럼 터져나왔다.

‘치… 한….'

동생 역시 블루맨의 파충류같이 축축한 시선을 알아본 눈치였다. 우리는 블루맨이 지하철을 타는 모습을 확인하며 그보다 한칸 앞에 탔다. 혹시나 해서 뒤를 돌아본 순간,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치한’이란 단어는 ‘스토커’로 변해버렸다.

“저 아저씨, 계속 쳐다보는데?”

나는 블루맨과 계속 시선을 교환하면서 앞칸으로 옮겼다. 그러자 블루맨이 우리가 있는 칸으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우린 계속 뒤를 돌아보며 앞으로 나갔다. 블루맨은 여전히 우릴 따라오고 있었다. 동생은 손을 떨며 내 팔을 잡았다.

“공포영화 같아!”

주변에서 게임을 하고 있던 남자와 그 옆의 아주머니도 우리의 호들갑에 눈길을 한번 쓱 주었다. 동생은 블루맨이 계속 따라오면 아주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할 생각으로 “엄마, 저 사람 봐!”를 연습하고 있었다. 이쯤 되자, 다른 승객도 우리가 위급하단 사실을 슬슬 눈치채기 시작했다.

“다음 역에서 내려! 내리자마자 바로 계단으로 뛰어!”

“따라 내리면 어떡해!”

문이 열렸다. 난 겁먹은 동생 손을 잡고 문 밖으로 훌쩍 뛰었다.

“앗!”

내가 소리쳤다.

“뭐야, 뭐야!”

“블루맨….”

나는 저 앞에 내린 한 남자의 등짝을 가리켰다.

“…이 아니네.”

블루맨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푸르딩딩, 파릇파릇, 푸르스름한 색깔 중 하나라도 눈에 띄면 왠지 오싹해졌다. 우리는 역 밖으로 나가 인파 속을 걸으면서도, 계속 뒤를 힐끔힐끔 보며 블루맨과의 숨 막히는(?) 추격전을 이어나갔다.

“근데 혹시 그 사람….”

동생이 말했다.

“우리가 보니까 따라서 쳐다본 거 아냐? 자길 왜 쳐다보나 궁금해서 쳐다본 건데, 우리가 괜히 착각하고….”

“그, 그, 그만!”

어쩌면 또 인정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영화가 공포물에서 명랑코믹물로 급변하고 말았단 사실을. 나는 <소년중앙>을 들켜버린 소년 같은 표정으로 헤벌쭉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수사는 원점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