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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일상의 괴물

엉뚱한 얘기지만, 영화 <괴물>에는 세 마리의 괴물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몹시 굶주린 괴물로 모양이 얄궂다. 거대하지만 날렵한 유선형 몸매에 발과 꼬리는 공룡 같고 입은 어떤 형체도 삼킬 수 있게 입체적이다. 체력과 운동신경도 발군이다. 강변을 뛰는 육상 같은 기본종목은 물론 고공다이빙과 수영, 철도 난간을 잡고 자유자재로 이동하는 고난도의 기계체조까지 구사한다. 습성은 빨리 달리고 닥치는 대로 삼키고 배부르면 낮잠 자며 여가도 즐긴다. 아주 유능하고 낙천적인 조폭 같다. 그런데 가만 보면 머리도 괜찮고 꽤나 성실하다. 경기 좋다고 방심하지 않고 먹이를 차곡차곡 축적할 줄도 안다. 이게 메타포라면 자본을 연상시킨다.

두 번째는 뭔가에 사로잡힌 몹시 악한 괴물이다. 이 괴물은 위생학적 습관을 가진 깔끔한 괴물이다. 일체의 이물질을 투명막으로 차단하고 시선으로만 세상과 교류한다. 이 괴물은 눈으로 봐야 알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은 모두 바이러스로 간주하는 습성이 있다. 이 괴물은 자신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를 찾지 못하면 불안해서 잠을 청하지 못한다. 그래서 급기야 사람의 뇌를 후벼파서라도 바이러스를 발명한다. 이 괴물은 체력이 달려 직접 뛰어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무식한 한강 괴물의 힘을 지혜롭게 악용한다. 이게 메타포라면 자신이 첫 번째 괴물의 사육자임을 숨기는 차디찬 합리적 시스템 혹은 그 시스템의 공장장일 터이다.

세 번째는 몹시 고민하는 슬픈 괴물이다. 요즘 괴물 왜 이리 폭력적이고 교활해? 도대체 이 괴물들 어디서 온 거야? 이 괴물들 없애려면 어떻게 해? 결론은 이런 것이다. 한강의 괴물은 미국의 강요(연구소장)와 거기 굴복한 한국(한인 연구원), 그리고 방관하는 백성들(낚시꾼)이 키운 것이고, 피해자는 매점의 일가족이다. 그리고 괴물을 물리치는 사람은 돈도 권력도 지식도 마누라도 없는 부실한 가장과 화살을 날리는 그 자체를 망설이는 착한 양궁선수, 학생운동의 기억을 안주 삼는 술주정뱅이, 그리고 또 다른 한명의 노숙자다. 괴물은 노숙자가 들이붓는 시너를 먹고, 술주정뱅이가 제조한 화염병에서 불씨를 얻은 양궁선수의 불화살에 죽는다. 자본에 치고 기술에 물먹고 미디어에 외면당한 사람들의 연대로 이룬 승리! 이 얼마나 아름답고 정치적인 얘기인가? 그런데 이 영화가 왜 괴물이냐고?

그건 이 영화가 사자의 머리와 사슴의 몸통이 접합된 형체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가장 빛나는 부분은 두 괴물의 생리를 묘사하는 대목이고 아쉬운 부분은 두 괴물과 싸우는 부분이다. 이 영화는 사자처럼 냉혹하게 인식하고 사슴처럼 소심하게 행동한다. 태평양 건너에 거대한 적을 설정한 용기는 적이 꿈쩍도 않을 화살과 화염병이 투쟁수단이라는 대목에서 상쇄된다. 사정거리 밖에 적을 설정한다는 것은 사정거리 안의 적을 보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이 영화는 왜 괴물이 서울을 강남과 강북으로 나누게 만든 ‘한강의 기적’이 배설해놓은 토종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제작비 100억원을 들인 블록버스터이기 때문이 아닐까? 멀리 있는 적을 가정하고 벌이는 저항의 퍼포먼스는 가장 손쉽게 우리 안의 결속을 끌어온다. 언제나 최대 득표를 욕망하는 이 세상의 모든 정치인은 그걸 알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블록버스터도 그걸 알고 있다. 그래서 <괴물>은 괴수영화의 틀로 거대한 적을 만들고, 서부영화의 틀로 착한 우리 편을 만들고, 민중주의와 애국주의와 휴머니즘이 기묘하게 배합된 정치성의 양념을 뿌린다. 그리하여 ‘매우 인간적인 정치적 소년’이라는 대중적인 정치성을 얻어낸다. 영화에서 사투를 벌이는 주체는 가족(주의)의 틀 안에 있는 ‘소년’이며 그 누구도 의식화된 싸움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정치성은 메타포의 형식으로 주체없는 원경의 메아리로만 제시된다. 생각해보라! 이 구도에서 관객의 감정이입이 주인없는 정치성에 대한 감응일지, 무구한 소년의 고군분투에 대한 반응일지.

멀리 있는 아주 큰 적과 이웃집 소년의 대립구도. 블록버스터의 욕망과 정치에 대한 강박. 그 사이엔 뭔가가 텅 비어 있다. 나는 이 빈 공간을 영화 밖에서도 종종 봤다. 아주 거대한 정치담론과 아주 사소한 욕망 사이에 쩍 벌어진 틈. 그건 한국사회의 정치와 지식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일상적 양태가 된 듯하다. 텅 빈 ‘중간’에 들어가야 할 것은 웅변도 침묵도 아닌 단순한 것, 말의 진심이다.

새로운 흥행기록을 수립하고 있는 이 영화가 내게 괴물인 이유는 한국 블록버스터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영화산업의 빛나는 성과임이 분명하지만, 이 영화의 어법과 정치성이 극장 밖에서 유통되는 것은 또 다른 많은 힘겨운 질문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대단하지만 내가 잘 알지 못해 공포스러운 것, 그걸 우린 일상에서 괴물로 명명한다. 내게 이 영화는 그런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