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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출연자 24시 [3]

최하나 기자의 보조출연 체험기

“둘할 때 움직이세요. 자자, 갑니다. 하나, 둘~!” 가슴이 방망이질친다.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암시를 걸 듯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긴다. 다리라도 엉켜서 넘어지면 어떡하지? 숨통을 죄듯 따가운 햇볕이 온몸을 찔러댄다.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걸까? 뜨끈뜨끈 달궈진 등줄기에 땀 한 방울이 주르륵 미끄러져 내린다. “컷~!!!” 생애 첫 영화 출연에 마침표를 찍는 시원한 외침. 작품명은 <바람 피기 좋은 날>. 역할은 행인3 혹은 행인4, 아니 행인7?

‘기자의 보조출연 체험’이라는 미션이 떨어진 것은 3주 전. 벼룩시장을 비롯해 갖은 구인구직 사이트를 전전했으나 건진 것이라고는 ‘야시시한 분위기의 여자’, ‘글래머 여성’ 등 엄두조차 안 나는 몇개의 채용공고뿐. 결국 보조출연자를 공급하는 업체를 직접 통하는 식으로 결론이 났다. 몇몇 업체에 끼어들 만한 자리가 생기는 대로 연락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다시 대기하기를 2주일여. 기다림 끝에 행인이라는 역할이 떨어졌다. ‘뭐, 그 정도라면…’ 하는 안심과 ‘겨우 행인?’류의 거만함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리고 마침내 D-day.

보조출연 첫째날_<바람 피기 좋은 날> 촬영현장

아침 7시, 잠을 미처 다 떨어내지 못한 부스스한 얼굴로 경기도 부천 송내역에 들어서니 출연자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저기, 안녕하세요.” 살짝 인사를 건네자 선뜻 반겨주는 분위기다. “언니 오늘 처음 왔나봐요? 여기는 항상 하던 사람들이 나와서 다 서로 알고 지내. 동호회 같은 분위기야.” 15명 남짓한 오늘 출연자들은 모두 ‘고정멤버’들. 아르바이트로 단발 출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가 생길 때마다 얼굴을 내미는 이들은 스스럼없이 친숙하다. 하지만 각자의 사연은 천차만별. 10년 동안 주유소를 하다가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생계형으로 보조출연에 뛰어든 P씨, 딸이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하기에 ‘대체 어떤 세계인지 내가 직접 체험해봐야겠다’고 나선 L씨, 내성적인 성격을 변화시키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는 K씨, 끊임없이 ‘셀카’로 표정 연습을 하는 연기자 지망생 S씨까지. “솔직히 돈이 목적이면 못해요. 온갖 사람들을 만나고 다른 세계를 알고, 그게 재밌으니까 하는 거지.” 보조출연은 “마약 같은 것”이라며 목청을 높이는 L씨에게서 은근한 애정이 묻어난다. “다들 이쪽으로 오세요!” 팀장의 고함에 한껏 높아졌던 목소리들이 순식간에 잦아든다. 촬영 개시다.

이날 촬영분 중 행인이 동원되는 것은 총 8컷. 내용은 간단하다. 길거리를 걷던 작은 새(윤진서)를 차를 타고 가던 남편이 불러 세워 대화를 나누는 장면. 그 뒤로 행인들이 지나가야 한다. 막상 카메라와 죽 늘어선 스탭들을 보니 긴장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행인마다 출발 지점과 도착 지점을 정하고, 걸어나오기 시작하는 시점과 동선 등을 지정. 하나라도 어긋나면 그건 바로 사고다. 윤진서를 구경하듯 바라보는 것도 잠시, 어느새 모든 신경은 두발끝에 쏠려 있다. “아니, 원래 그렇게 걸어요?” “딴 데 보지 마요!” “신호 보내면 움직이라니까.” 팀장의 호통이 터져나올 때마다 안일한 자신감이 산산이 날아간다. A지점에서 B지점으로, 다시 B지점에서 A지점으로, 오가는 것만 수십 차례. 카메라가 돌지 않는 사이를 틈타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낸다. 걷기와 기다림, 그리고 걷기. 고된 반복이다.

걷고 또 걷고, 8~9시간 서있으니 발바닥 퉁퉁

간단히 점심식사를 마친 뒤 두 번째 촬영장소인 백화점 앞으로 이동. 이번엔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리는 행인 역이다. 가장 큰 적은 역시 더위다. 아스팔트가 이글거리는 열기를 뿜어낼 때마다 간신히 불어넣은 기운마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버린다. 출연하지 않는 사람들은 공모라도 한 듯 일제히 백화점으로 이어지는 통로 앞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약간의 냉기라도 취해 몸을 식혀보고자 함이다. 흉해 보인다 생각하면서도 발걸음이 저절로 그곳으로 향한다. 포대자루를 내려놓듯 시멘트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물 한 모금 마시며 숨을 고르는데 K씨가 다가와 갑작스레 던지는 말. “혹시 우리 사진 찍었어요?” “네, 그런데….” “다 지워주세요. 그거 누가 보면 어떡해요?” 굳은 표정으로 삭제를 종용하던 그는 사진이 지워지는 것을 일일이 확인한 뒤에야 자리를 뜬다. 옆에 있던 S씨가 해명을 하듯 속삭인다.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자기 좋아서 이 일 하는 거지만, 솔직히 사람들 시선이 그렇잖아요. 길거리 촬영할 때마다 중학생도 놀리면서 무시하는데.” 이야기를 듣던 아저씨들이 “그게 전부 다 페이가 낮은 탓”이라며 분통을 터뜨린다. 12시간 노동에 보수는 3만원. 시간당 2500원꼴이다. “한달 내내 뛰어도 교통비니 뭐니 빼고 손에 쥐는 건 50만원이 안 돼. 보조출연자들끼리 새벽시장에서 생선 나르다 마주치는 경우도 있다니까.”

마지막 촬영을 마치자 어느새 저녁 7시다. 아스팔트 위에, 신문지 위에 잠시 엉덩이를 붙였던 순간을 제외한다면 8~9시간 정도를 꼬박 서 있었던 셈. 머리카락은 땀에 젖은 채 바싹 들러붙었고, 발바닥은 퉁퉁 부어올랐다. “다들 모이세요~!” 모두가 기다리던 시간. 만원권 뭉치를 손에 쥔 팀장이 동그랗게 열을 맞춘 사람들에게 ‘일당’을 나누어주기 시작한다. 왠지 모를 민망함에 몸을 숨기고 있자, 팀장이 다가와 빙그레 웃는다. “받으세요. 아침부터 똑같이 고생하셨으니 드리는 겁니다.” 못 이기는 척 3만원을 받아 쥐는데, 찌르르한 전율 같은 것이 가슴속을 훑고 지나간다.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몸은 쇳덩이처럼 무겁지만 다시 어딘가로 걸어가야 할 것 같은 묘한 느낌에 발끝이 간지럽다. 지갑에 넣은 3만원의 무게가 그 어느 때보다도 묵직하다.

보조출연 둘째날_<특별시 사람들> 촬영현장

오색찬란한 꽃무늬 남방에, 짝을 맞춘 꽃무늬 치마. “최대한 없어 보이는 의상으로 준비”하라는 말에 한 시간 넘게 어머니의 옷장을 뒤져 찾아낸 비장(?)의 결과물이다. 경기도 안성시 양성에 자리한 <특별시 사람들>의 촬영현장.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되기 전 의상팀의 ‘옷 검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이날 보조출연자들에게 주어진 역할은 판자촌 주민. 계절만 맞추면 어떤 옷을 입건 큰 무리가 없었던 행인과는 달리 의상 컨셉이 확실한 역할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촌스럽지’ 했던 확신을 가볍게 배반하듯 준비해간 상하의 두벌이 전부 퇴짜를 맞았다. 대신 주어진 것은 큼직한 꽃무늬가 빽빽하게 들어찬 원피스. 80년대 스타일로 벙벙하게 벌어진 어깨선도 그렇지만 마름모꼴의 칼라가 가히 압권이다. 민망함에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데, 뒤에 서 있던 아주머니들은 오히려 문제의 원피스가 부럽다는 표정이다. “치마라 시원하겄어.” “아가씨라고 원피스 줬구만. 좋겠네.” 너털너털 몸뻬를 흔들어대는 그분들 앞에서 불만 섞인 표정을 지을 수는 없는 법. “그러게요. 바람이 통하니까 좀 나아요.”

이날 촬영에 동원된 보조출연자는 총 89명. 분장을 기다리는 줄이 컨테이너 앞에 길게 늘어서 있다. 1시간 반의 기다림 끝에 이어진 10분여의 분장. 흙빛의 파우더를 두드리는 능숙한 손놀림에 얼굴은 어느새 뙤약볕 세례를 평생 받아온 양 거뭇거뭇해졌다. 고무줄로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실핀을 냅다 꽂으니 완벽한 판자촌 여인으로 변신. 슬금슬금 피하던 거울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순간 우하하 폭소가 터져나온다.

정말 내면 연기를 하고 있는 보조출연자들

분장을 마치고 나온 시각은 저녁 7시. 식사 뒤 8시부터 촬영이 시작해 다음날 새벽 6시까지 이어지는 밤샘 강행군이다. “오늘 촬영하는 장면은 성당 안에서 주민들이 노래를 듣는 장면이에요. 비닐하우스 안에 성당을 만들어놨는데 저 안에 냉방이 전혀 안 돼서 많이 힘드실 겁니다.” 실장의 브리핑에 여기저기서 한숨이 새어나온다. 또다시 찜통 더위라니. 그나마 앉아 있을 수 있으니 좀 수월하지 않을까 했던 막연한 기대는 비닐하우스에 들어서는 순간 곧장 흩어져버렸다. 숨이 턱 막히는 텁텁한 열기. 43번. 지정 좌석을 찾아 앉는데 어느새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물이라도 좀 줘봐요!” 하는 불평부터 “돈 안 들이고 사우나하고 좋지 뭐” 하는 능청스런 여유까지 출연자들의 반응은 각양각색. 하지만 노랫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하자 좌중은 일순 잠잠해진다. 박철웅 감독이 직접 나서 장면을 설명한다. “삶에 찌들었던 주민들이 아름다운 노래를 듣고 감동을 받는 장면입니다. 얼음이 녹듯 마음의 응어리들이 싹 녹아내리는 감정을 표현해주셔야 합니다. 정말 연기를 해주셔야 돼요.”

얼음이 녹아내리듯?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되는 줄 알았더니 아예 ‘내면 연기’를 해야 한다니. 겸연쩍은 마음에 곁눈질을 해봤더니 웬걸, 사람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진지하다. 정말로 눈물을 글썽거리시는 할아버지, 충격을 받은 듯 입가에 손을 가만히 가져다대는 아주머니, “정말 좋다”며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는 콤비까지. ‘감동받아라’라는 지시 하나에 각자의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 박수 하나를 칠 때도 온몸을 흔들어가며 손바닥을 맞부딪치는 이들은 분명 배우들이다. “사실 더운 것 빼면 힘든 거 없잖아요? 사람을 무시하고 짐짝 부리듯 하는 곳도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여기는 우리를 연기자로 대우해주잖아.” 뻘쭘하게 앉아 연신 부채질을 해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걸까. 44번, 옆자리의 아저씨가 다독이듯 이야기한다. ‘연기’라는 단어에 눈을 빛내는 사람들. 작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 자기 몫을 제대로 해내겠다는 욕심이 느껴지는 이곳에서 어색한 방관으로 일관할 수는 없는 법. 생초짜가 동원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연상법’을 발휘, 27년 생애 존재했던 모든 감명적인 사건들을 끄집어냈다. 기분 때문인지 몰라도 정말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만 같다.

각양각색 사연을 담은 얼굴들

시곗바늘이 3시를 넘어가기 시작하자 하나둘, 전사자들이 속출한다. 카메라가 멈출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픽픽 고꾸라지는 사람들. 밀려오는 졸음에 눈을 감고 있는데 누군가 등을 툭툭 때린다. “아가씨, 이거 발라봐.” 뒷줄에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건네는 것은 다름 아닌 물파스. 팔뚝에 대고 슬슬 문지르니 화~한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든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다들 일어나세요!” 사인이 떨어지자 엎어져 있던 사람들도 금세 고개를 들고 자세를 곧추세운다. 물파스의 위력일까 아니면 비닐하우스 안을 지배하는 묘한 열기에 동화되어버린 걸까. 망설임과 어색함은 완벽히 사라져버렸다. 먹먹해진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은 오직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뿐. 그렇게 ‘감동 먹기’를 수십 차례. 멈춰버린 것 같던 시간이 흘러 어느새 예정된 종료시각 6시다. 흐느적대며 비닐하우스 밖으로 빠져나오자 날이 밝고 있다. “일당 드려야지. 그 돈 쓰지 말고 고이고이 간직하세요.” 실장이 웃으며 하얀 봉투를 건넨다. 6만5천원. 밤샘촬영이기에 기본 수당의 2배에 추가 수당 5천원이 붙은 액수다. 서울로 향하는 차 안, 눈을 붙이기 위해 좌석을 젖힌 채 누웠지만 현장의 여운이 쉽사리 마음속을 떠나지 않는다. 엑스트라. 보조출연자를 비하하는 말으로 여겨진다는 이야기에 이틀 동안 한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던 단어를 되뇌어본다. 그전까지 떠올렸던 것이 희뿌연 군중의 실루엣이었다면, 이제는 각양각색의 사연을 담은 얼굴들이 또렷하게 살아난다. 그 얼굴들을 하나로 잇는 것은 꿈과 땀. 영화라는 커다란 화폭에 든든한 밑그림을 그려내는 수많은 꿈과 땀이다. 엑스트라. 그 단어의 올바른 사용법은 extra(여분)가 아닌 extra(특별)한 연기자가 아닐까. 그들과 함께한 24시간이 가져다준 작은 결론은 그렇다.

보조출연자 5계명

하나. 30분 일찍 준비하라. 촬영장에서는 필요한 인원보다 많은 수를 부른 뒤 선착순으로 자르는 경우가 빈번하다. 허탕을 치고 싶지 않다면 30분 정도는 여유를 갖고 도착할 것.

둘. 의상 3벌은 기본이다. 일반적인 현대물의 경우 캐주얼 2벌과 정장 1벌을 기본적으로 준비해야 한다. 실제 계절과 작품 속 계절은 다를 수 있으니 유의할 것. 빨간색, 노란색 등 지나치게 튀는 원색의 옷은 피해야 한다.

셋. 연락처 관리는 생명이다. 촬영 스케줄은 대부분 촬영 전날 급히 확정된다. 언제 어느 때고 통화가 가능한 연락처를 소속사에 남겨놓을 것. 친한 출연자들끼리 연락망을 구축하는 것도 좋다.

넷. 이미지를 만들어라. 수많은 보조 출연자들 중 선택받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이미지를 하나쯤 구축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아줌마면 아줌마, 회사원이면 회사원 등 특정 역할이 필요할 경우 곧장 자신에게 연락이 오게끔 하라.

다섯. 기다림에 대비하라. 촬영이 한두 시간 지체되는 것은 흔한 일이고, 하루 종일 ‘광을 팔 때도’(속어로, 일없이 시간을 때우는 것을 의미)있다. 뜨개질을 해도 좋고 공부를 해도 좋다. 남는 시간에 할 만한 무언가를 준비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