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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의 전당] <천국의 나날들>
ibuti 2006-08-28

비극적 로맨스 위로 흐르는 아름다운 농경시

또 한 소녀가 길을 나서는구나. 얼마 전 <노리코의 식탁>의 마지막에 한숨을 쉬었다. 영화에서 소녀가 길을 떠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 건 꽤 오래전부터다. 멀리 <저주받은 재산>이 그랬고 가까이는 <판타스틱 소녀백서>가 그랬다. 그중 머릿속에 각인된 것은 <천국의 나날들>의 마지막 장면이다. 걱정과 희망의 낭만적 범벅과 까닭 모를 설렘. 로저 에버트는 “<천국의 나날들>은 10대 소녀 이야기로, 화자인 그녀의 마음속에서 희망과 기쁨이 어떻게 부서졌는지가 영화의 주제다”라고 했다. 오누이인 빌과 린다 그리고 빌의 연인인 에비는 떠돌이다. 시카고에서 사고를 치고 텍사스에 도착한 그들은 거대한 밀 농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에비를 본 농장주는 그녀에게 반한다. 악마와 천사의 경계에 선 인간이 화염에 휩싸인 세상과 천국의 정원 사이를 오간다는 종교적 메타포를 담고 있는 <천국의 나날들>은 강바닥에 떨어진 유리잔처럼 언제 부서질지 모르는 낙원의 현재 때문에 가슴 졸이게 만들며, 간간이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는 끊어질 듯 이어지는 기도로 들린다. 그런데 <천국의 나날들>을 처음 본다면 영상에 숨이 막혀 이런 줄거리쯤은 잊을 확률이 높다. 네스토 알멘드로스와 (오프닝 크레딧에 이름이 빠져 있는) 해스켈 웩슬러의 작업을 두고 ‘영상이 아름답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기차, 구름과 풀과 밀, 허수아비, 바람, 석양, 달, 눈과 불을 카메라에 넣고 시를 쓴다면 <천국의 나날들>이 나오지 싶다. 밀레 유파의 일원으로 모자람이 없는 <천국의 나날들>은 자연을 통찰한 자가 그린 농경시다. 그리고 그 캔버스 위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세 남녀의 비극적 로맨스와 아름다운 농경시 사이에서 영화의 균형을 잡는 건 소녀의 내레이션인데, 소녀의 세계는 눈앞에 있는 사람 몇으로 온통 채워져 있기에 소녀는 그들의 세계와 시간의 주변을 쉼없이 맴돈다. 동요하지 않고 덤덤한 표정으로 그들을 관찰했던 소녀의 마음은 얼마나 콩닥거리고 있었을까. 그리고 말했듯이, 소녀는 길을 떠난다. 불같은 열정을 바라본 소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따라갈 것이고, 순수한 영혼은 그렇게 세상과 미래를 알아갈 것이다. 이후 테렌스 맬릭은 <씬 레드 라인>과 <신세계>를 띄엄띄엄 발표했으나, <천국의 나날들>의 위대함은 이 영화를 만들던 순간이 맬릭 자신에게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천국의 나날’이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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