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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속사정을 담은 네 남자의 범죄극, <하이라이프>
김현정 2006-08-30

진창에서 뒹굴고 있다고 하여 모든 이들이 천상을 꿈꾸는 것은 아니다. 밑바닥에 갇힌 남자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탈출하고자 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상승을 향한 몸부림에 휩쓸리기도 하고, 현재에 중독되어 미래를 내던지기도 한다. 그 때문에 네명의 모르핀 중독자들이 한탕을 계획하는 <하이라이프>는 그저 남성적인 범죄극보다는 복잡한 속사정을 지니고 있다. 저 남자들에게 정말 꿈이 있는 걸까. 다시 돌아서지 못하도록 가속을 더해가는 <하이라이프>는 모르핀에 빠진 남자들의 나른하고 무책임한 범죄 속에서 겉과 속이 다른, 그 자신조차도 눈치채지 못하는 삶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모르핀 중독자지만 영리한 딕은 지갑을 훔쳐 그 안에 들어 있던 카드로 현금인출기를 터는 좀도둑 도니를 보고 자기 인생을 한번에 바꿀 수 있는 범죄를 구상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함께 사고를 치며 감옥에 드나들었던 벅을 끌어들인 딕은 마약중독자 갱생모임에서 만난 미남 빌리까지 포섭해 멤버를 완성한다. 반드시 네명 모두 있어야만 하는 은행강도 계획. 그러나 살인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포악한 벅은 쉴새없이 마음 약한 도니를 괴롭히고, 전과도 없는 ‘햇병아리’ 빌리를 못마땅해한다. 잘생긴 얼굴과 능숙한 언변으로 여자들을 등치고 살아온 빌리도 한치 물러서지 않고 벅과 맞선다. 네 사람이 자동차 한대에 모여 타고 실행의 순간을 기다리는 30, 40분 동안 긴장은 참을 수 없이 고조되어간다.

박광정과 민복기가 공동연출한 <하이라이프>는 상황과 인물이 촘촘하게 맞물려 있는 밀도 높은 극이다. 딕은 약물이나 협박을 이용해 반강제로 나머지 세명을 끌어들였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이 범죄에 참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목장을 갖고 싶거나 약물로 망가진 장기를 이식받아야 하거나 돈이 매우 필요하거나. 수만달러를 손에 넣을 수만 있다면 지금까지의 삶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르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보고 있으면 실패 또한 예정되어 있다. 벅은 볼링핀을 넘어뜨리듯 살인을 일삼는 인물인데, 빌리는 조그만 주머니칼을 휘두르며 그의 신경을 긁는다. 겁이 많고 몸이 망가진 도니는 의도한 것은 아니라고 해도, 중요한 순간마다 돌출 행동을 한다. 그 파열할 듯한 긴장감은 캐릭터와 맞아떨어지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코미디로 완화되지만, 그 때문에 파국을 의미하는 딕의 육중한 대사 한마디는 무대가 갑자기 냉동창고로 떨어지는 듯한 싸늘한 느낌을 준다. 모르핀 중독자들의, 통증과 환희가 뒤섞인 쾌락의 순간, 어처구니없는 희극과 비극의 교차, 누구나 가지고 있다고 믿지만 그 실체는 오묘한 희망. <하이라이프>는 이처럼 복잡한 요소들을 능숙하게 엮고 있다.

<하이라이프>는 연극배우 출신이고 영화의 조연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들이 모인 배우조합 예지림 제작 작품. 배우인 이남희와 유연수, 조영진, 정해균은 눈썰미 좋은 관객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이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