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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3]
천명관(소설가) 2006-09-06

<해변의 여인> 감상기② 더 성숙하길 기대하며

선비, 홍상수의 고백적 자아들

영화감독이다. 시나리오가 안 풀린단다. 그래서 후배와 함께 지방으로 떠난다. 제작자에게 진행비도 받았겠다, 다리 긴 여자도 하나 끼어 있다. 이제 바람 좋은 곳에 가서 소주나 마시며 연애 좀 하는 거다. 하긴 서울에 무슨 미련이 있겠는가. 어차피 중앙이 내 것이 아닌 바에야. 그렇게 2006년의 선비는 다시 길을 떠난다. 언제나 그랬듯이….

멀리 삼류소설가에서 출발해 대학 강사와 화가, 영화감독 지망생 등 문화예술계 언저리를 배회하던 홍상수의 고백적 자아는 일곱 번째 영화를 통해 드디어 자신의 본래 직업인 감독으로 돌아왔다. 비로소 맨 얼굴을 드러낸 셈이지만 소주 좋아하고 여자 좋아하는 건 여전하고 엇박자 대사와 뒤틀린 자의식도 영락없는 홍상수표 영화의 주인공답다.

전작, <극장전>에서 선배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베꼈다고 투정을 부리던 그 어설픈 충무로의 낭인이 이제는 알아보는 팬도 있고 그의 영화를 좋아해서 같이 자주는 여자도 있는 어엿한 충무로의 감독으로 변신한 것이다.

‘생각을 더 해야 해’, ‘생각만이 나를 살릴 수 있어’라고 자신에게 끝없이 다짐을 하더니 그간 제법 생각을 많이 한 모양이다. 이제 처세에도 눈을 뜨고 뻔뻔함과 유연함이 더해져 제작자와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도 알고 요사스런 화법으로 여자를 감동시키는 재주도 생겼다. 또한 주인공의 언저리를 늘 불편하게 맴돌던 유치한 공격성과 냉소도 무뎌지고 근거를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서도 벗어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홍상수의 영화 속 자아는 진화를 한 것일까?

모든 출발점에 삼류소설가 효섭(<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김의성)이 있다. 출판사를 찾아가 대책없이 싸우고 평론가를 두들겨 패서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자신을 좋아하는 순진한 매표원에게 돈을 꿔 유부녀와 여관에서 뒹굴던 그는 누구일까? 정서적 미숙과 나약한 내면, 역겨운 엘리트주의와 뒤틀린 자의식의 소유자인 그는 이후,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을 거듭하며 홍상수의 모든 영화에 출현한다. 대학 강사와 화가, 무명배우와 방송국 PD, 영화감독 지망생과 진짜 영화감독….

한마디로 좀 재수없고 고리타분한 이 지식인 아저씨들은 문화계 언저리와 대학가를 배회하며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거나 생선구이에 소주를 마시거나, 또는 광어회에 소주를 마시다 훌쩍 서울을 떠난다. 강릉과 낙산, 춘천과 경주, 그리고 태안의 바닷가… 그리고 그곳엔 언제나 여자가 있다.

아니, 여자가 없으면 아예 영화는 출발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늘 딴생각에 빠져 있어 한없이 무력해 보이기만 하던 그들이 유일하게 눈빛을 반짝이며 유치한 사술을 발휘하는 것은 암컷을 만났을 때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섹스는 드라마가 생겨나는 유일한 지점이 된다.

하여간 여자 말고는 타인에게 도통 아무런 관심도 없고 대화는 언제나 겉돌며 관계는 곧잘 파탄에 이르고 모호한 행동으로 우스꽝스런 해프닝을 연출해 실소를 머금게 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분노와 광기를 드러내기도 하는 그들. 그들에게서 오래전 옛날, 물 맑은 정자나무 아래 어여쁜 기생을 옆에 끼고 음풍농월하던 선비들의 이미지가 겹쳐졌다면 그것은 나만의 지나친 상상력일까?

선비란 누구이던가? 치열한 권력투쟁의 중심에 서 있던 정치가이며 고상한 심미안을 가진 예술가인 동시에 과학자이자 전술가이며 화가이자 문필가인, 당대 모든 재화와 권력의 독점자, 세상의 유일한 주인이었던 그들….

그 엘리트들은 근대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모든 권력을 내려놓고 무장해제된다. 세상이 ‘선비들의 세상’에서 ‘장사꾼의 세상’으로 바뀐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선비들의 윤리적 투쟁은 계속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전히 세상과의 접점을 찾지 못한 그들은 예술계와 대학가를 유령처럼 배회하며 술과 연애로 세월을 보낸다. ‘상투적이고 사악한 이미지’들과 싸우며 결코 ‘괴물은 되지 말자’고 다짐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이제 ‘음풍농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니 어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어찌 떠나지 않고 배길 도리가 있겠는가. 그리고 그들이야말로 일찍이 무진의 안개에 취해 서울을 떠난 이래 한국 문학 속에 무수히 등장하며 소설의 행간을 넘나들던 바로 그 눈빛 깊은 사내들 아니었던가!

진짜 선수는 상대를 자신의 링으로 불러들여 싸운다고 하더니! 어느덧 홍상수의 화법에 중독된 이들은 그가 읊는 풍월에 취해 마냥 키득대며 자해의 카니발에 눈과 귀를 맡긴다. 농담은 더 유연해졌고 불편함은 덜해졌다. 그리고 문학에서 태어난 게 분명한 그 깊은 눈빛의 사내들은 분명 홍상수의 영화를 통해 진화했다. 하지만 삶을 부정하는 농담은 좋은 농담이 아니다. 누군가의 말대로 냉소 또한 건강에 좋을 게 없다. 그저 관객으로서 개인적 바람이지만 나는 ‘권력을 잃어버린 선비들’의 자아가 좀더 성숙해지길 기대한다. 그리고 그 허망한 상실감과 지독한 엘리티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무언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거나 미워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영화고 그것이 김기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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