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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바르셀로나와 양재천
최하나 2006-09-08

바르셀로나. <오기사, 행복을 찾아 바르셀로나로 떠나다>를 읽은 것이 발단이었다. 한껏 마음이 부풀어 있던 차에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뒤늦게 <스페니쉬 아파트먼트>를 보았다. 걷잡을 수 없는 탈주의 욕구가 뭉클뭉클 솟아올랐다. 한시바삐 배낭을 둘러메고, 트렁크를 끌고, 공항에 들어서야 할 것만 같았다. 낯선 거리에 발을 내딛고, 지도를 펼쳐든 채 어눌한 현지어로 길을 묻고, 허름한 아파트를 숙소로 잡고, 다국적의 친구들과 속살대며 얼마 남지 않은 20대의 뒷머리를 불살라야 할 것만 같았다. 생각해보면, 이런 식의 두근거림은 무척이나 오래된 것이다. 처음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넌 순간부터 저 너머에 존재하는 낯선 공기는 솜털 한올한올을 곧추세울 듯한 짜릿함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흔히 말하는 여행의 미덕, 새로운 문화를 접할 때의 신선한 자극과 시야를 넓혀주는 가르침 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원초적인 떨림, ‘낯섦’과 접촉했을 때 솟아나는 두려움과 흥분의 퍼레이드랄까. 울렁울렁한 가슴을 진정시켜보고자 서점을 찾았다. 여행 코너를 애써 외면한 나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그러나, 어학 코너. 스페인어 회화책을 뒤적대다가 결국 한권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잠들기 전 침대 위에 누워 잠시 몇개의 단어를 우물거렸다.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느껴지는 어색함과 위화감. 난 밤마다 그 의례를 반복하며 묘한 포만감에 젖어들었다.

양재천.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에 이사온 것은 초등학교 1학년 때. 그때부터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아파트 단지 바로 뒤편에 자리한 양재천은 부동의 놀이터였다. 더럽고 냄새나는 하천. 동네 아저씨들이 가끔씩 다리 아래 낚싯대를 드리우던 그곳이 맑아지고, 잡초들이 보기좋게 정돈되고, 가로등이 세워지고, 사람들이 애정을 표하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동안, 나 역시 많은 부침을 겪었다. 그리고 기억의 그림 속에는 언제나 양재천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폭우가 쏟아질 때면 슬리퍼를 찍찍 끌고 나가 불어나는 흙탕물을 구경했고, 조깅 트랙이 깔린 다음부터는 그 위를 달리며 갖은 각오와 결심들을 쏟아놓았다. 남자친구가 생기면 신고식을 치르듯 항상 데려가는 데이트 코스였고, 실연을 하면 친구들과 맥주 한잔을 하며 푸념을 늘어놓는 옥외 포장마차였다. 양재천은 이를테면, 발을 옮길 때마다 내 개인의 역사가 뚝뚝 묻어날 것만 같은 곳이다. 바르셀로나. 발음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물감이 느껴지는 그 생경한 설렘이 결코 닮을 수 없는 편안함과 따뜻함으로 가득한 곳.

떨림과 익숙함, 새로움과 낡음. 이곳에 있을 때는 저곳을 갈망하고, 저곳에 있을 때는 이곳을 그리워한다. 어느 한쪽에 온전히 마음을 허락하지 못하는 것은 과욕일까, 다만 어쩔 수 없는 본능일까. 한손에 거머쥐기에는 바르셀로나와 양재천 사이의 간극이 버겁다. 아니 혹은, 마음에 새겨넣을 무수한 중간 지점을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침대에 누워 아스라한 동경에 사로잡히기보다는 가까운 곳부터 하나둘 밟아나가는 것. 징검다리를 하나씩 놓아가듯 떠남과 머무름의 적절한 리듬을 체득하는 것. 내가 알지 못했던 여행의 진정한 미덕은 그것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