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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이 되고 싶었던 청춘, <뚝방전설>
김현정 2006-09-05

전설이 되고 싶었던 청춘, 그들의 우습고도 쓰라린 깨우침.

“전설 아닌 청춘이 어디 있겠는가.” 노타치파의 2인자 성현(이천희)은 병원 가운을 벗어던지고 뚝방으로 달려가면서 전설과 청춘에 관한 익숙한 경구를 읊는다. 그는 “우리의 전설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추억 하나없이 서른 언저리로 가야 하기 때문”에 십대 시절 노닐던 뚝방에서 전설처럼 싸워야만 한다. 그러나 모든 청춘이 전설이라면, 그것은 모든 청춘이 왜곡과 과장으로 기억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터이다. 전설과 현실 사이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혹은 전설과 현실 사이에서 무엇을 택할 것인가. 사라졌던 전설의 주먹이 돌아오면서 시작되는 <뚝방전설>은 코미디와 액션이 뒤섞인 상업영화이면서, 진짜 세계와 맞부딪친 전설을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묘한 청춘영화이기도 하다.

18 대 1의 전설을 가지고 있는 정권(박건형)은 주먹은 세지만 싸움에는 그다지 뜻이 없는 성현(이천희)과 싸움은 전혀 못하고 말만 많은 경로(MC몽)와 함께 교내 조직 물레방아파를 평정한다. 1학군의 1인자가 된 정권은 더이상 싸울 상대를 찾지 못하자 노타치파를 새로 만들어 사회 조직 뚝방파를 제압한 다음 뚝방을 접수한다. 그리고 5년이 흐른다. 진짜 조직에 들어가겠다며 동네를 떠난 정권은 소식이 없고, 성현은 방사선 기사가 되어 있고, 경로는 노래교실 강사로 뛰고 있고, 뚝방은 도로 뚝방파의 것이 되었다. 대규모 조직의 보스 이치수(유지태)가 뚝방 재개발 사업과 맞물려 이 동네로 들어올 무렵, 과거 그와 안 좋은 인연을 맺었던 정권이 홀연히 돌아온다. 야채를 팔거나 고깃집 숯불을 지피며 지리멸렬한 삶을 살던 노타치파의 옛 조직원들은 다시 한번 정권 아래 모여 전설을 되살리고자 한다.

단편 <장마> <어떤 여행의 기록>, 디지털장편 <양아치어조> 등을 만들었던 조범구 감독은 청춘을 한없이 빛나던, 영원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로 채워진 시절이라고 강변하지 않는다. 그의 아이들은 돈도 사랑도 손쉽게 얻지 못해 변두리에서 맴돌고, 가진 것이라곤 시간뿐이어서 인생이 지나치게 지루하고, 아마도 경로의 아버지 유씨(임현식)처럼 그 변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늙어갈 것이다. 정권이 뚝방을 접수한 이유도 마땅히 할 일이 없던 차에 지나가던 뚝방파가 형님인 척 위세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노타치파가 기껏 접수한 뚝방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개천에 종이배를 띄우고 풍류 운운하거나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는 일뿐이다.

그러나 <뚝방전설>은 지지리 궁상인 변두리 청춘을 애써 아무 생각없이 희극적으로 보여준다. 어느 정도 주먹을 쓰고 과묵한 2인자와 실속없는 수다쟁이라는 성현과 경로의 캐릭터는 지극히 전형적이지만, 자세하게 설명을 하지 않아도 관객이 바로 납득할 수 있는 그 전형성 덕분에, 두 사람은 시시한 농담을 던지거나 다소 과장된 행동을 일삼을 수 있다. 경로가 패싸움 와중에 각목에 맞아 쓰러지면서도 바짝 태엽을 조인 장난감처럼 떠들어대며 웃기는 장면도 그가 익숙한 캐릭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의문은 남는다. 조범구 감독은 이 상처 많은 시절을 다루면서 반드시 웃음으로 미끄러져 가야만 했을까. 아직 테크닉이 붙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가 때때로 웃음의 타이밍을 놓치게 하기 때문에 그런 의문은 더욱 아쉬움을 남긴다.

<뚝방전설>이 세상에 내던져진 젊은이들과 함께 주목하는 대상은 그 세상을 돌아나온 중년의 유씨와 상춘(오달수)이다. 물레방아파 창시자였다고 주장하는 유씨와 상춘이파 보스였지만 지금은 퇴락한 카바레 하나만을 간신히 움켜쥐고 있는 상춘은 노타치파의 미래를 거울로 비춰주는 듯한 인물들이다. 청운의 꿈을 품고 대처로 떠났지만 사시미칼이 난무하는 진짜 폭력의 세계를 목격하고 파들거리며 겁먹은 채 숨어버린 정권, 여자친구가 자기 집에서 바람 피우는 현장을 목격하고도 캔맥주만 들이켜며 아무 말 못하는 성현, 반짝이 재킷을 입고 찜질방에서 아줌마들의 흥을 돋우는 경로. 이들은 간직해야 할 추억도 친구도 없어 독만 품은 치수처럼 세상을 헤쳐나가지는 못할 것이고, 경계 앞에서 물러날 줄 아는 상춘처럼 과거의 영광만 씹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이기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성현과 경로는 마지막으로 뚝방에 나간 정권을 향해 달려간다. 전설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뻔한 미래만 남은 하류인생에게 자랑삼을 과거조차 없다면,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얼핏 보기에 호쾌하게 내지르는 듯한 <뚝방전설>의 결말은 쓸쓸하고 가엾게 느껴지기도 한다. 찰박거리는 뚝방에서의 결전이 무슨 자랑이 된다고, 가운도 벗고 애인도 팽개치고, 그들은 뚝방으로 모여들었을까. 아마도 그날 밤 모질게 얻어터졌을 노타치파는 통닭을 튀기고 야채를 배달하며, 대부분의 아저씨들이 그러하듯 술마시고 웃다가도 울분을 토하며, 그저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우리가 노타치파를 만들었지, 주정을 해가면서. <뚝방전설>은 이처럼 웃기는 한편 비감어리고, 통쾌한 반면 남루하다. 그 때문에 <뚝방전설>은 보이는 것보다 많은 상념을 감춘 영화지만, 그것을 다르게 보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호한 영화라는 의미도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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