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추천작 [3] - 리얼리즘영화
씨네21 취재팀 2006-09-29

정치·사회적 비극을 고발하는 리얼리즘영화 8편

잔인한 현실,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카불 익스프레스> Kabul Express 카비르 칸/ 2006년/ 인도/ 106분/ 아시아영화의 창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의 은거지로 아프가니스탄을 지목하자 파키스탄은 그동안 지원해온 탈레반 정권으로부터 등을 돌린다. 다큐멘터리 형식을 가미한 <카불 익스프레스>는 그즈음인 2001년 11월,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다섯명이 지프 ‘카불 익스프레스’를 타고 국경으로 향하는 로드무비다. 인도 저널리스트 슈엘과 카메라맨 제이는 가이드 겸 운전사로 고용한 카비르의 안내로 탈레반을 인터뷰하려고 하지만 성과를 얻지 못한다. 카불을 배회하던 그들은 낙오된 파키스탄인 탈레반 임란에게 납치되어 파키스탄 국경으로 향하게 된다. 도중에 세 사람은 임란을 제압할 뻔도 하지만 카불에서 만나 뒤를 따라온 미국인 저널리스트 제시카까지 덩달아 포로가 되고 만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몇편의 다큐멘터리를 찍었던 감독 카비르 칸은 극영화로는 데뷔작인 <카불 익스프레스>를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웃음과 흥과 눈물이 한데 섞인 영화로 완성했다. 기자 정신은 어디에 갔는지 “엄마 아빠가 엔지니어나 의사가 되라고 할 때 말을 들을걸 그랬지”라며 한탄하는 제이와 정작 위험한 순간이 되면 제이만 재촉하는 슈엘은 공들여 만들었을 법한 귀여운 콤비다. 이 귀여운 콤비가 탈레반을 때려죽이는 군중에게 임란을 넘기지 않는 건 억지로 조성된 우정 때문이 아니다. 자신들이 목격한 야만에 치를 떨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굴곡 많은 여행이 끝나고 임란의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카불로 돌아오며 제이는 독백한다. “그는 정말 적이었을까. 우리는 모두 노래를 좋아했고, 최소한 거의 모두는, 크리켓을 좋아했다.” 함께 노래부르던 다섯명은 저마다의 비극을 간직한 채 고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혹은 영원히 버려지거나.

<젊은 여자> Fraulein 안드레아 슈타카/ 2006년/ 스위스/ 87분/ 월드 시네마

2006 로카르노영화제 황금표범상 수상작. 이국땅에서 살아가는 세 여인의 삶을 그렸다. 젊은 여자 아나가 취리히로 간다. 사라예보 출신인 아나는 밀라의 도움으로 루자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아나는 낙천적인 성격으로 인생을 즐기며 살고 있지만, 루자는 30여년간 타지생활을 하여 엄격하고 깐깐하다. 세 사람 모두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으로, 이제 그곳을 떠나 살고 있는 상태. 젊고 자유로운 아나는 엄격하게 정리된 일상을 지키려는 루자에게 생일파티를 열어주고, 루자는 서서히 변화해간다. 루자는 백혈병을 앓는 아나를 돌봐주려 하고, 고국을 떠난 뒤 무시하고 살려고 했던 추억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젊은 여자>는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세 여인을 이야기하면서 전쟁이나 정치적인 문제를 중심에 두지 않는다. 안드레아 슈타카 감독은 정치적인 목소리나 이국에서 살아가는 여인들의 눈물어린 감동극을 배제하고, 대신 세 여인이 겪는 이방인으로서의 정체성과 세대차의 문제를 섬세하게 그려냈다. 정교한 연출과 연기 덕에 루자와 밀라, 아나의 존재감은 생생하게 살아나고, 그들이 겪는 내면의 변화는 보는 사람의 마음 한구석을 잔잔하게 울린다. 안드레아 슈타카 감독은 스위스 태생으로,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하며 단편영화 제작지원을 받고 <유고디바스>에서 <루자>에 이르는 단편영화들을 만들었다. <젊은 여자>는 그녀의 장편 데뷔작이다. <버라이어티>는 <젊은 여자>에 대해 “스위스영화의 강렬한 새 목소리”라고 호평했다.

<여름궁전> Summer Palace 로우예/ 2006년/ 중국, 프랑스/ 135분/ 아시아영화의 창

200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이며, 2000년 PPP 프로젝트 부산상 수상 작품. 여주인공 유홍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에 살고 있다. 작은 마을에서 자란 유홍은 베이징의 대학에 진학한 뒤 저우예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감정적으로 불안정한 유홍은 저우예와의 관계에서 감정적 고난을 겪는 동시에 그와의 관계에 과도하게 매달리는데, 이런 유홍의 심리상태는 당시 불안정했던 중국사회의 내면적 불안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중국 내에서 민주화에 대한 열기가 고조되는 것과 비슷한 속도로 영화 속 유홍의 섹스는 점점 더 격렬해지고 개방적으로 변해간다. <여름궁전>은 중국 정부의 검열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칸영화제 경쟁부문 출품이 결정되어, 중국 정부는 영화제 기간 중 <여름궁전>에 관한 중국 내 보도를 엄격히 금지했으며 영화의 중국 상영 또한 금지했다. 로우예 감독은 최근 정부로부터 5년간 영화제작 금지처분을 받았다.

<영광의 날들> Days of Glory 라쉬드 부샤렙/ 2006년/ 프랑스, 벨기에, 알제리, 모로코/ 120분/ 월드 시네마, 특별전 - 프랑스 동시대 작가들

1943년 알제리 청년 사이드는 조국 프랑스를 구하자는 구호에 고무되어 북아프리카 식민지 국민으로 구성된 군대에 자원한다. 그 부대의 하사관 마르티네즈는 어머니가 북아프리카 출신이지만 그 사실을 숨기고 병사들을 모질게 괴롭히는 인물이다. 식민지 출신도 노력만 하면 장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압델카데르, 성격이 불같은 야시르, 아름다운 프랑스 여인과 사랑에 빠진 메사우드 등은 독일군이 점령한 알자스의 어느 마을로 파견되어 프랑스 군대가 도착할 때까지 버텨야 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북아프리카 식민지 군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가장 위험한 전투를 담당했기 때문에 부상자와 사망자가 프랑스 군대보다도 많았다. 자신도 알제리 출신인 라쉬드 부샤렙은 당시 전투에 참전했던 군인들을 인터뷰하여 과거를 다큐멘터리로 되살린 듯한 영화를 만들었다. 모래알이 서걱거리는 듯한 <영광의 날들>은 그들을 위한 추모곡이자 변하지 않은 현실을 일깨우는 경고이기도 하다.

<그르바비차> Grbavica 야스밀라 즈바니치/ 2006년/ 오스트리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90분/ 월드 시네마

밀랴나는 세르비아 군인들에게 강간당해 낳은 딸 사라를 홀로 키우고 살아간다. 딸의 수학여행이 다가오자 그는 사라예보 시내의 한 나이트 클럽에 웨이트리스로 취직을 해 여행비를 번다. 하지만 자신이 상이용사의 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사라는 “상이용사 증명서만 있다면 무료로 수학여행을 갈 수 있다”며 아버지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하고, 망설이던 밀라냐는 반항하는 딸에게 결국 출생의 비밀을 폭로하고야 만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의 신인감독 야스밀라 즈바니치는 모녀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도 결국 끌어안는 과정을 담담히, 그러나 폭발적인 감정을 실어서 담아낸다. 전쟁세대와 전후세대의 아픔을 모두 짊어진 <그르바비차>는 과거의 망령으로부터 스스로를 씻어내려는 사라예보 여인들의 가슴아픈 씻김굿이다. 제56회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할리> Holly 가이 모셰/ 2006년/ 미국, 캄보디아/ 113분/ 월드 시네마

캄보디아의 아동성매매 문제를 다룬 영화. 프놈펜의 악명 높은 K11 홍등가에서 촬영되었다. 미국인 패트릭은 오토바이가 고장나 한 작은 마을에서 며칠간 머무르게 되는데, 그곳에서 소녀 할리를 만난다. 할리는 열두살에 불과하지만 홍등가에 팔려온 상태다. 할리는 패트릭에게 가졌던 경계심을 풀지만, 첫 손님을 받아야 하는 때가 다가오자 패트릭에게 자신을 사달라고 한다. 패트릭은 할리의 말을 일갈하고 마을을 떠나지만 할리가 걱정되어 다시 돌아가고, 할리가 다른 홍등가로 팔려갔음을 알게 된 뒤 할리를 찾아 나선다. <할리>는 동남아시아 아동성매매의 현실을 보여준다. 경찰을 포함한 정부 관리가 개입되어 있고, 베트남과 같은 국경 너머에서 아이들을 데려오며, 아이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집요한 협박을 퍼붓는다. <할리>는 동남아시아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나눌 것을 웅변하는 동시에 극적 긴장감 또한 놓치지 않는다.

<타인의 삶> The Lives of Others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2006년/ 독일/ 137분/ 월드 시네마

10만명의 비밀경찰이 활동하며 모든 것을 감시하던 냉전시대의 동독. 냉혹한 작업 방식으로 상부로부터 두터운 신뢰를 받고 있는 비밀경찰 비즐러는 극작가 드레이만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집안 곳곳에 도청장치를 하고 감시체제에 들어간 비즐러. 그러나 그는 감시를 계속할수록 드레이만의 삶과 생각에 이끌리기 시작하고, 동독의 실상을 고발하려는 그의 행보를 은닉하기에 이른다. <타인의 삶>은 모두가 서로를 고발하고 배신했던 잔혹한 시대의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면서도, 냉엄한 공기 속 어딘가에 존재했을 한줄기의 휴머니즘을 섬세한 손길로 조명해나간다. 기계와 같던 사나이가 도청기 너머 들려오는 피아노 선율을 통해 이방인의 슬픔에 공명하는 순간은 지극히 아름답다. 자신의 모든 것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드레이만을 보호한 비즐리, 그런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하던 드레이만. 두 사나이의 삶이 마침내 접점을 형성하는 영화의 결말은 인간과 인간의 가장 순수한 연대를 향한 찬사와도 같다.

<런던에서 브라이튼까지> London to Brighton 폴 앤드루 윌리엄스/ 2006년/ 영국/ 86분/ 월드 시네마

도시의 폭력적 어둠 속에 살아가는 두 여자 이야기. 창녀인 조안은 어느 날 포주 데릭에게서 어린 소녀를 구해오라는 말을 듣는다. 조안은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소녀 켈리를 발견하고는, 돈을 줄 테니 따라오라고 한다. 켈리가 아동성애자인 돈 많은 남자에게 학대당할 위기에 처하자 조안은 켈리를 구해 런던에서 브라이튼으로 도망친다. 포주는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을 찾기 위해 집요한 추적을 시작한다. 팔 것이라고는 몸뿐인 한 여자가 자신보다 어린 소녀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만 하룻동안의 이야기는 폭력으로 얼룩진다. 영국 내에서는 도망온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여인이 경험하는 잔인한 현실을 대담하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런던에서 브라이튼까지>는 감독 폴 앤드루 윌리엄스의 단편인 <로열티>를 개작한 것으로, 그의 장편 데뷔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