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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말해요
2001-09-13

쾌락의 급소 찾기 마지막회 - 가장 커다란 눈동자는?

여자만화는 눈동자가 절반을 말한다고들 한다. 정말이다. 강경옥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의 세배는 될 만한 큰 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을 검은 눈동자가 차지하고 있다. 눈동자는 마치 우주와 같아 그 속에 작은 은하계가 춤을 추고 있다. 눈부신 태양과 별들이 반짝거리며, 그 미묘한 빛으로 주인공의 깊은 심상을 드러낸다. 그녀의 SF가 복잡다단한 과학적 장치의 박람회가 아니라 외로운 우주 속에 태어난 한 존재의 깊은 감정의 탐험이라는 걸 알게 해준다.

눈동자가 말해주는 작가의 특성

황미나 역시 별빛 반짝이는 로맨틱한 눈동자를 그려내길 좋아한다. 그러나 강경옥에 비해서는 부피가 작고, 검은 동자 역시 짧은 직선의 맛이 살아날 정도로 단단하게 그려내는 편이다. 가끔은 극도로 촉촉한 눈동자를 그리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느 정도 과장된 패러디에 가까워 보인다. 판타지를 추구하면서도 한쪽으로는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만화가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정제된 보석처럼 가로로 균형있게 자리잡은 눈, 그리고 짙은 아이라인과 아랫속눈썹의 강조. 신일숙의 눈동자는 현실 속에 존재할 법하지 않은 환상의 주인공들을 만들어낸다. 유순하고 감정이 풍부한 주인공들을 그려낼 때는 비교적 검은 눈동자를 크게 그리며 그 속에 일렁이는 물결을 만들어내지만, <아르미안의 네 딸들>의 레 마누처럼 단호한 캐릭터를 그릴 때는 작지만 견고한 눈동자가 오히려 신비성을 더욱 강화한다. 신일숙의 눈동자는 독자와 주인공의 거리감을 분명히 할 때 좀더 아름다워 보인다.

지독히 아름답지만 또 지독히 차가운 눈동자를 그려내는 만화가는 역시 하기오 모토다. 김진 등의 만화가가 눈동자를 그릴 때 붓의 터치를 살려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면, 하기오는 철저하게 펜선의 질감을 살리고 그것을 수십번 겹쳐서 각각의 눈동자를 직조해낸다. 가끔은 두세개의 동심원만으로 대단히 사이키델릭한 눈동자를 그려내기도 하고, 또 가끔은 흰자위 하나도 없이 완벽하게 검은 선으로 눈을 채우며 그 속에 무수한 별을 집어넣기도 한다. 또 정반대로 극도의 경악이나 분노의 상태를 그릴 때는 눈 안을 하얗게 비워버리기도 하는데, 이 수법은 <유리 가면>(미우치 스즈에) 등의 만화에 빈번하게 사용되어 이른바 ‘눈알 비우기’라는 애칭을 가지게 되었다.

동아시아만화의 주인공은 서구의 만화보다 훨씬 큰 눈동자를 지니고 있다. 데즈카 오사무가 디즈니의 영향을 받아 큰 눈의 귀여운 주인공을 만들어내고, 이후 소녀만화에서 서구의 귀족사회가 주요한 소재가 되는 동안 큰 눈 전통은 매우 공고해졌다. 큰 눈은 무엇보다 독자에게 어필하기 좋다. 큰 눈은 순진하고 어려 보이고, 눈동자 속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쉽게 알아채게 만든다. 그래서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애니메이션 주인공들 속에서 큰 눈 전통은 더욱 강화되었고, 동인지의 강력한 성장 속에서 90년대 이후에는 이른바 ‘아니메 스타일’이라는 게 등장한다.(대표적으로 클램프의 주인공들) 다른 모든 것을 제쳐두고 ‘큰 눈’으로 표상되는 이 아니메 스타일의 만화는 서구가 동아시아만화에 갖게 되는 편견에 강력히 일조한다. 그들은 동아시아만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을 비정상적인 신체 비례를 지닌 ‘괴물’로 인식했다.

오오토모 가쓰히로로부터 시작되는 동양형의 사실적인 주인공 만들기가 하나의 줄기를 형성하고 있지만, 큰 눈의 매력과 중독은 쉽게 떨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강력한 사이버펑크SF의 기류를 만들어낸 <공각기동대>의 시로우 마사무네나 <총몽>의 기시로 유키토도 큰 눈의 여자주인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총몽>의 주인공은 그래도 제법 사실형, 그리고 입체형의 눈을 가지고 ‘로봇’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공각기동대>의 주인공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아니메 스타일의 거대 눈동자다. 물론 그것이 만화가와 독자군의 강력한 유대감 속에 형성된 것이지만, 좀더 넓은 대중을 상대하기에는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오시이 마모루가 <공각기동대>의 애니메이션을 만들면서 주인공의 얼굴형을 완전히 바꿔버린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의 눈빛 공격

큰 눈이 어울리는 것은 역시 어린아이다. <짱구는 못 말려>는 전반적으로 시각적인 완성도가 떨어지지만 짱구의 눈만큼은 명료하고 개성적이다. 사고뭉치 짱구는 언제나 그 큰 눈을 이용한 ‘어린아이의 눈빛 공격’으로 자신의 엽기적인 행각을 용서받는다. <키드 갱>의 꼬마 주인공 역시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큰 눈을 지니고 있고, <닥터 슬럼프>의 아라레도 순위 1, 2위를 다투는 왕눈이다. <아기와 나>의 신이는 그 엄청난 크기의 눈으로 모든 사람에게서 밑바닥의 애정을 이끌어내려는 듯하다. 그리고 큰 눈의 공통점은 언젠가 한번쯤은 엄청난 눈물을 쏟는다는 사실이다. 얼굴의 절반은 차지할 듯한 눈에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 예민한 독자라면 만화가가 그 장면을 얼마나 그리고 싶어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당신의 눈을 먼저 본다. 당신이 얼마나 착한 마음씨를 가지고, 얼마나 뛰어난 솜씨를 지녔든간에, 당신의 눈에서부터 당신을 판단하기 시작한다. 만화 주인공의 눈빛에서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배워보자.

이명석/ 프로젝트 사탕발림 운영중 www.sugarspr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