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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칼럼] 아주 특별한 인연
오정연 2006-10-20

뉴델리에 사는 23살의 신뚜는 한국인 배낭여행객 전문 가이드였다. 역시 가이드였던 두형의 조언을 따라 일찌감치 한국어를 배웠고 힌디어와 영어까지 3개 국어를 할 줄 아는 이 구김살없는 청년은 가이드 아르바이트로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하는 것을 넘어서 자신의 여행사를 차려서 많은 돈을 버는 것이 목표였다. 지난해 4월 말, 발리우드를 취재하기 위한 열흘간의 출장 기간 동안 현지 코디네이터였던 그의 원대하고도 소박한 꿈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시 아득한 기분이 되곤 했다. 우리는 이후로도 몇달에 한번씩 안부를 전했고, 그때마다 인도에 놀러오면 특별 무료 가이드를 해주겠다는 것이 그의 인사였다. 올해 신뚜는 드디어 여행사를 차렸고 나는 가끔씩 그의 가이드로 인도를 여행할 날을 상상한다.

베니스대학 영화학도 다비드는 언제나 친절했다. 베니스영화제 기간 동안 마주쳤던 이탈리아의 뭇 청년들은 꽃처럼 아름답지만 왠지 느끼했으나, 그는 좀 달랐다. 한국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사이트를 운영하는 그는 자신이 한국어를 할 줄 모른다는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서툰 영어 취재에 늘 깍듯하게 응해주곤 했다. 다비드는 이후 부산영화제와 전주영화제 등을 방문했고 바쁜 영화제 와중에도 식사 한끼를 함께하는 것은 늘 반가운 일이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영화평론가협회에 등록하여 정식 영화평론가가 됐음을 자랑스레 알리던 그는 현재 런던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다. 널널한 유럽여행길에 그를 만나 이탈리아의 환상적인 아이스크림을 다시 한번 맛보는 것은 내 인생의 몇 가지 꿈같은 계획 중 하나다.

비교적 긴 출장길에서는 언제나 곁에 두어 뿌듯한 인연을 제법 만나곤 한다. 결정적인 취재원이 아니기에 부담없이 친해질 수 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완벽한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기에 쓸데없는 오해나 참견 역시 불가능하다는 한계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기사를 쓰고 나면 취재원을 향한 관심의 촉수도 자연스럽게 무뎌지는, 이른바 ‘싸가지없는’ 기자가 되어버린 지금. 이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걸지 않아도 좋은 ‘영양가없는’ 인연이 작지만 큰 기쁨이라면, 너무 서글픈 일일까.

이번 요코하마에서의 3박4일 동안은 에노키다 부부를 알게 됐다. 이번호 기사에 짤막한 인터뷰를 통해 남편인 에노키다 류지를 소개했지만 빙산의 일각이다. 여느 일본인과는 조금 다른 외모를 지닌 류지와 그저 자그마하기만 한 부인 도모코는 세 아이의 부모다. 류지가 직접 받은(!) 큰딸 가나코는 언제나 군것질거리를 나눠주는 상냥한 소녀로 엄마를 빼닮았다. 아버지를 똑 닮아 사내애로 오해받는 막내딸 아키코는 맨발로 이곳저곳을 누비는 씩씩한 아이인데, 넘어져도 툭툭 털어버린 뒤 씩 웃어 보이는 미소가 일품이다. 엄마와 아빠를 정확하게 섞은 외모의 둘째 가즈마는 유일한 아들인데 셋 중 가장 여린 성격의 소유자다. “아이와 함께 시장으로 향하는 엄마는 길거리 개미행렬을 바라보는 아이의 놀이를 방해해선 안 된다. 그날 저녁을 짓지 않아도 아이와 함께 언제까지나 개미를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 사내와 그 가족이 화를 내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본을 떠나는 날. 케냐의 사막화와 일본 어린이들의 삭막한 감수성을 동시에 고민하는 이 열혈 활동가는 자그마한 선물을 건네면서 10월 말 한국을 방문할 것이라 말했다. 그와의 짧은 만남은 또 다른 활력이 되어줌을 알기에 아무리 바쁜 마감의 와중이어도 그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