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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여 아직 살아 있는가, 별은 빛나건만
2001-09-14

시대극의 풍작 속 영화제 상업화 우려 목소리 들려

이탈리아의 저명한 문화평론가 비토리오 지가르디는 베니스영화제 개막식 초청에 응하는 대신 언론과 마주앉았다. 그리고 초대장을 보낸 영화제 집행위원장 알베르토 바르베라의 가슴에 비수를 날렸다. “베니스 비엔날레가 죽어간다. 아르테(arte)가 죽어가고 있다.” 비난의 요지는 영화제를 포함한 베니스 비엔날레가 덩치 불리기에만 급급해 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상업화돼가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로 올해 베니스영화제의 외양은 많이 화려해졌다. 메인 행사장인 리도섬에서 공식상영이 끝나면 베니스 시내와 메스트레, 마르게라 등 주변 지역 극장에서 릴레이 상영을 하는 식으로 판을 크게 벌였고, 영화제 주요 행사장의 수와 규모를 늘렸으며 그중 카지노 건물은 영화제쪽이 직접 매입했다는 소문도 돌고 있다. “3년 동안 많은 변화의 노력이 있었고, 그만큼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자부한다.” 개막식에서 바르베라가 볼멘 소리로 이런 자화자찬을 한 것은 지가르디를 겨냥한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타인들>, 대중적·비평적으로 호평

적어도 지금까지는 베니스영화제가 덩치를 불림으로써 어떤 긍정적인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베니스의 주민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한 자긍심은 하늘을 찌를지언정 동네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관해서는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일년 내내 이런저런 페스티벌 속에서 살아가는 이곳 사람들은 웬만한 자극제 앞에서는 시큰둥한 얼굴이다. 행사장의 공기는 이런 이유로 연일 차분히 가라앉아 있다. 또 리도의 행사장은 만원이지만, 시내 릴레이 상영은 별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다.

현지 취재진과 관객이 상기된 얼굴로 환호를 보내는 것은 할리우드 스타를 대면할 때뿐인 것 같다. <타인들>의 니콜 키드먼이 베니스에 도착해 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동안 사진기자로 가득 찬 보트 8대를 따돌렸다거나, <옥전갈의 저주>의 섀를리스 테론이 영국 출신 남자친구와 베니스에 동행했다거나, <트레이닝 데이>의 덴젤 워싱턴이 휴가철에 베니스를 자주 찾아온다거나 하는 얘기들이 신문과 잡지의 많은 지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 특히 할리우드 스타가 영화제의 꽃이 되는 것은 어디서든 마찬가지지만, 베니스의 경우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영화들을 비경쟁부문에 몰아놓음으로써, 할리우드산 영화를 인정하지 않으면서도 스타들을 출품자 자격으로 초청해 관객을 불러모으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비상업적인 영화들로 꾸린 상업적인 영화제인 셈이다. “베니스는 이제 국제영화제의 주도권을 프랑스 칸으로 넘겨버렸다”는 얘기가 이탈리아 영화인들 사이에서도 심심찮게 오가고 있다.

올해 베니스영화제를 달구고 있는 또 하나의 이슈는 바로 세계화 논쟁이다. 지난 7월 제노바에서 열린 G8정상회담 당시 반세계화 운동가들의 시위에서 사상자가 발생한 뒤 반세계화 움직임은 점차 가열되고 있으며 영화계로도 확산되고 있다. 이탈리아 감독들이 당시 상황을 기록한 다큐를 제작하고 있고, 영국의 사회파 감독 켄 로치도 영화제 기간 동안 이들에게 지지의 뜻을 전한 바 있다. 이런 움직임은 올해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의 상당수가 2개국 이상의 합작품이라는 사실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다국적 또는 무국적의 영화 제작이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 즉 영화계에도 세계화의 바람이 불어닥치고 있는 현실 때문에 더욱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제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지금까지 올 출품작에서 드러난 하나의 경향이라면, 시대극의 풍작과 연극적 표현의 과잉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경쟁부문에서만 <타인들> <에덴> 등 줄잡아 8편이 시대극이고, <당신은 누구십니까?> <사랑의 승리> 등이 연극과 섞여 있거나 연극적인 표현을 차용한 작품들. 커다란 화제를 뿌린 작품들은 주로 메인 경쟁부문인 ‘베네치아 58’에 몰려 있다. 그 가운데 대중적으로, 비평적으로 가장 좋은 평가를 얻고 있는 작품이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타인들>이다.

이 작품은 2차대전 직후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비밀을 파헤치는 스릴러로, <식스 센스>와 유사한 설정이라는 지적을 들을 만하지만, 관객을 시종 긴장시키며 장르적으로 잘 이끌어간 영화라는 호평이 지배적이다. 베를린영화제에서 <중앙역>으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는 월터 살레스의 신작 <달의 뒤편에>도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호응을 얻은 작품. 아버지의 존재를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파드레 파드로네>와 비견되지만, 두 집안의 해묵은 반목이 천진한 형제의 삶을 앗아가는 과정을 유려한 영상으로 펼친 이 작품은 관객을 좀더 감성적으로 반응하게 만든다.

작품별 평점- <당신은 누구십니까?> 1위

영화제 중반을 기점으로 주간지 <Film TV>에서 발행하는 데일리가 15개 이탈리아 일간지와 잡지에 의뢰한 작품별 평점을 공개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는 포르투갈의 궁정사극 <당신은 누구십니까?>가 폐막 사흘 전까지 1위를 달렸다. 병약한 한 소녀를 통해 16세기 포르투갈의 왕정사를 짚어보는 작품으로, 의도적인 연극적 연출이 특징적이다. 철도 노동자들의 애환을 그린 켄 로치의 신작 <네비게이터>도 감독의 대표작 반열에 오를 만하지는 않지만, 그런 대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리푸블리카>는 “노동자 계급을 다루는 감독으로서의 치열함과 부드러운 애정, 그리고 솔직함이 돋보인다”고 호평했다. ‘값진 발견’으로 꼽을 만한 작품도 있다. 서로 상처를 주고 또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독과 절망을 차갑게 담아낸 오스트리아영화 <한여름>, 투표날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란사회의 여러 단면을 투사해내고 있는 <비밀 투표>는 극의 완성도와 재미가 높아 많은 인기를 누린 작품이다.

<비포 선라이즈>의 리처드 링클레이터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결합시켜 만든 <웨이킹 라이프>는 호평과 혹평이 크게 엇갈리는 대표적인 경우다. 반면 애초 기대를 모았던 거장들, 아모스 기타이, 앙드레 테시네, 베르너 헤어초크가 신작의 봉인을 뜯자 관객과 평단 모두 실망스러워하는 분위기다.

한편 <Film TV> 데일리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김기덕 감독의 <수취인 불명>은 15개 작품이 공개된 시점에서 5위에 랭크돼 있다. 매체별로 내놓은 점수의 편차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적은 편으로, 찬반이 엇갈리는 대신 고른 지지를 얻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경쟁부문 ‘오늘의 영화’에서 상영된 송일곤 감독의 <꽃섬>은 ‘견고한 구성의 영화’라는 조용하지만 견고한 평가를 받았다.

박은영 기자 cinepark@hani.co.kr

▶ 제58회 베니스 영화제

▶ 송일곤 <꽃섬> 현지반응

▶ 유세프 샤인의 <조용히... 지금은 촬영중>과 스즈키 세이준의 <피스톨 오페라>

▶ <조용히...> 감독 유세프 샤인 인터뷰

▶ <피스톨 오페라> 감독 스즈키 세이준 인터뷰

▶ <타인들>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