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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고흐, 커트 코베인, 그리고 이상
권리(소설가) 2006-10-27

예술잡지가 주선한 작은 모임이 있었다. 미술인, 음악인, 나를 포함한 3인의 대담(은 무슨, 그냥 잡담)이었다. 주제는 예술가의 제스처에 관한 것이었다. 사회자는 미끼로 낸시 랭을 던졌다. 낸시, 귀엽고 깜찍한 그녀. 시랭 언니가 귀여운 건 인간극장 시청자라면 누구나 다 알게 되었다. 그녀의 몸짓에 의해 철저히 가려진 그녀의 그림이 TV에 의해 발가벗겨졌다. 그녀에 대한 미술인의 의견이 궁금했다. 뭐라고 뭐라고 한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기분 나쁘단 뜻이겠지. 낸시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의견은 대부분 이렇다. 낸시 랭은 제스처 덩어리야. 그 말의 뜻은… 꺼져, 사이비야!

누군가는 말했다. 이제 예술이 할 수 있는 건 메시지가 아니라 언어의 영역이라고. 포스트모던에 한발이라도 살짝 담가본 사람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다. 언어가 뭘까. 언어는 다른 말로 제스처다. 예술은 고등사기란 백남준의 말이 있지만, 여기에 한마디 보태겠다. 예술은 고등 제스처 사기다. 많은 위대한 작가들은 독특한 제스처들이 있다. 고흐에겐 귀를 뚝뚝 떼어다 쓴 듯한 두껍고 강렬한 필력이 있고, 커트 코베인에겐 서서히 타오르지 않고 한꺼번에 타죽을 듯한 목소리가 있고, 이상에겐 어떤 시대의 기호학으로도 풀 수 없는 암호가 있다. 그것이 그들의 제스처다. 3인의 아해들은 자해와 죽음을 제스처 구현의 방식으로 선택했다. 시간은 어제처럼 흘러갔고 역사는 그들을 신으로 만들어주었다. 현세의 독자들은 운이 좋다. 전혀 다른 우주의 신들을 동일 시공에서 비교할 수 있으니까. 반면 현세의 예술가들은 운이 나쁘다. 언제나 그 신들과 동일 시공에서 비교당해야 하니까.

세 사람은 모인 지 한 시간 동안 여러 혼잣말을 주고받았다. 대화는 수평 직행 중이었다. 용기있는 미술인이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사실 고흐가 문제예요. 뒤샹의 화장실 유머를 처음 발견했을 때처럼 흥분이 됐다. 어쩌면 우리 셋은 어느 한 사람이 먼저 그 발언으로 자폭해주기를 기다렸던 것인지 모른다. 의견이 하나로 뭉치면서 대화는 수직 상승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고흐가 나쁜 놈이에요, 커트 코베인은 어떻고요? 이상은 미친, 그러니까, 에이, 이상입니다. 물론 아무도 그들 각자가 독특한 예외란 사실을 부정한 사람은 없었다. 위대한 예술은 위대한 예외란 사실을 그들은 확인시켜주었다.

후대인들은 자해공갈예술인 고흐와 마약중독자 커트 코베인, 자폐적 수학자 이상에게 갖가지 수식어를 달아준다. 최고, 최저, 최대, 최소, 최다, 최하, 최장, 최단. 가끔 예술 뒤로 완벽히 숨어버린 예술가들에게 후대는 ‘최초’라고 이름 붙이기도 한다. 후대인들은 수학 문제 풀기가 지겨워져서 포기한 채 신화로 도피한다. 아마 그들은 고흐, 커트, 이상에게 완벽한 가정, 완벽한 국가, 완벽한 현재가 있었다 하더라도 새로운 신화를 창조해낼 것이다. 가령 평생 잘 먹고 잘살았지만 말년이 불행했다든가, 연애 박사였지만 결혼은 매번 실패했다든가, 잘 빠진 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새끼손가락 하나가 굽었다든가.

피카소 전시회에 갔을 때 ‘예술은 그것을 보는 이에 의해서만 살아 있다’라고 적힌 글을 본 적 있다. 궁금했다. 정말 피카소가 우리가 다 예상한 ‘그런’ 뜻으로 그 말을 한 것일까? ‘예술은 그것을 사서 봐주는 이에 의에서만 살아 있다’가 아니고? 할 수 없다. 어차피 예술은 예술가의 언어를 메시지로 오해하는 후대들에 의해 성립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예술가로서 확실히 뜨고 싶으면 모호한 메시지와 확실한 제스처를 사용하는 게 좋다. 가끔 음주운전도 하고 학교도 자퇴하고 가능하면 자살도 해보면 좋다. 다만 그것이 ‘개폼’이란 느낌이 날 만큼 어설프면 안 된다. 가끔 ‘개폼’임이 분명한데 제스처라고 믿고 있는 예술가들을 보면 안타깝다. 고등하지 않은 개폼은 언제든 ‘개쪽’으로 갈 가능성이 있다는 걸 망각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물론 시랭 언니 얘기는 아니다. 판단은 여러분이 아니라 후대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