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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끼리 볼 만한 데이트무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김혜리 2006-10-24

<워킹 걸>과 <귀여운 여인>의 21세기판 진화. 여자친구끼리 볼 만한 데이트무비.

도시의 아침이다. 여자들은 각반을 차듯 종아리에 스타킹을 말아올리고 속눈썹을 곧추세운다. 아직 침대에서 뭉개고 있는 남자친구에게 키스를 날리고 반짝이는 구두에 발끝을 밀어넣는다. 지금 싱그러운 그녀들은 약 6시간 뒤면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는 자기 최면을 삼세번 중얼거리며 심호흡으로 무너지는 신경을 붙들 것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오프닝 시퀀스는 군장을 꾸리는 병사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녀들은 전쟁 중이다. 학보사 편집장 이력서를 품고 저널리스트를 꿈꾸는 앤드리아 삭스(앤 해서웨이)도 그 전장에 끼어들기 위해 면접에 나선다.

<보그> 편집장의 어시스턴트로 일했던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언뜻 듣기에 낸시 마이어스 감독(<왓 위민 원트> <사랑할 때 버려야 할 아까운 것들>) 같은 현대 여성 풍속화가의 일감이다. 앤드리아가 도전한 언론계 첫 관문은 세계 패션산업을 쥐락펴락하는 잡지 <런웨이>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메릴 스트립)의 비서직이다. 44사이즈 저체중 여자들만 또각또각 오가는 <런웨이> 사무실에 들어선 소박한 앤드리아는 열대어 수조에 잘못 넣어진 광어처럼 어색하다. 그러나 미란다의 변덕(?)- “이번엔 뚱뚱하고 똑똑한 애를 써볼까?”- 으로 앤드리아는 편집장의 두 번째 비서로 채용된다. 내키면 슈퍼 모델도 낙상시키고 발렌티노의 바늘도 부러뜨리는 ‘절대자’ 미란다의 요구는 모호하고 느닷없다. 그녀의 행태는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것은 예측 불가능임을 확인시킨다. 반문은 대역죄에 해당되고 막연히 ‘거기’를 예약하라거나 ‘그 스커트’를 가져오라고 명하면 어떻게든 알아내 대령해야 한다. 비서의 업무 내역에는 미란다의 쌍둥이 딸의 숙제와 신간 <해리 포터> 원고를 미리 빼돌려 제본하는 일도 포함된다. 가장 불우한 대목은 모든 격무를 회사 분위기에 맞는 10cm 굽 스틸레토 힐을 신고 완수해야 한다는 사실. 포기하려던 앤드리아는 명성과 명품에 둘러싸인 직장이 약속하는 미래와 친절한 아트디렉터 나이젤의 도움으로 적응하고 능력까지 발휘한다. 이번엔 그녀의 오랜 벗들과 남자친구 네이트(에이드리언 그레니어)가 “넌 영혼을 팔았어!”라고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세계는 외모와 남들이 부러워하는 정도로 자신을 채점하고 자책하는 습관에 남자들보다 고질적으로 시달리며, 한 가지를 얻으려면 한 가지를 포기하라는 규칙에 익숙한 여성들의 스트레스를 압축한다.

원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원숙한 소설이 아니다. 서사는 종종 제자리걸음을 하고 작가가 투사된 주인공의 자기연민이 넘치기도 한다. 원작자보다 세련된 이야기꾼인 시나리오작가 알린 브로시 맥켄나는 플롯은 적절히 솎아내고 캐릭터는 다듬었다. <섹스 & 시티>를 연출한 바 있는 데이비드 프랑켈 감독은 소설의 독자를 애타게 만들었을 게 분명한 촉각과 시각의 갈증을 패트리샤 필드의 의상에 힘입어 훌륭히 해소한다. 시점을 1인칭 주인공에서 3인칭 관찰자로 옮긴 영화의 선택은 미란다 프리슬리에게 무게중심을 옮긴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백마 탄 왕자가 아니라 백마 탄 여왕을 만난 신데렐라 이야기다. 원작의 미란다는 담벼락 같은 괴물이지만 영화의 미란다는 앤드리아에게 중요한 사실을 교육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마저 내는 ‘멘토’다. 패션산업에 대한 변호는 시나리오가 보강한 대목 중 하나. 벨트를 둘러싼 에디터들의 논란에 실소를 짓는 앤드리아에게 미란다는 쏘아붙인다. “넌 네가 지성깨나 있는 줄 알겠지만 실상은 제가 뭘 입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어.” 곧이어 미란다는 앤드리아의 스웨터 색깔을 예로 패션은 사람들이 실제로 입는 예술이며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계를 움직이는 힘이라고 설교한다. 이 영화에서 메릴 스트립은 글렌 클로즈풍이다. 은어처럼 미끈한 말투로 심장을 베고 뺨의 근육이나 턱을 아주 조금만 움직여 천 가지를 표현한다. 신데렐라의 요정 대모처럼 앤드리아를 돕는 아트디렉터 나이젤도 남몰래 축구 대신 재봉을 배우던 시골 소년에게 패션잡지가 얼마나 귀중한 등대였는지 고백한다. 스탠리 투치의 연기는 빼거나 더할 데가 없다.

여성영화의 비주얼은 가끔 표면적 서사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허영의 골목을 빠져나가는 젊은 여성의 이야기지만, 눈이 휘둥그레지는 의상과 액세서리를 콜라주한 몽타주 시퀀스들이야말로 이 영화의 쇼윈도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실제로) 아름답고 (최소한 극중에서) 지적인 앤 해서웨이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는 사회초년생이 선 벼랑을 실감케 하진 않는다. 그래도 영화는 최선의 균형을 유지하며 이야기의 실밥을 마무리한다. 앤드리아의 마지막 결단은 남자친구의 애정이 야심보다 중요해서가 아니라, 우회로에서 얻을 것을 다 얻었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설명한다. 한편 <런웨이>의 권력을 다잡는 미란다의 행보는 부덕의 소치가 아니라 그녀가 게임의 규칙을 아는 자, 나아가 게임의 설계자이기 때문이다. 앤드리아는 <런웨이>를 은근히 경멸하는 ‘지성적인’ 저널에 미란다의 퉁명스러운 추천에 힘입어 취직한다. 그녀의 새로운 수습기간은 또 어떤 수업료를 요구할까. <악마는 들뢰즈를 읽는다> 같은 속편은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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