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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1]
글·사진 오정연 2006-10-25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에 속하는 영화광이며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1930년생이다. 지난 9월25일, 일본영화학교 교장으로 요코하마 학생영화제 심포지엄에 참석한 그를 만났다. 시대와 취향을 막론한 방대한 저술을 자랑해서인지 지금도 특정 일본영화나 감독에 대해 말하기 위해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경우가 많다. 각종 기사와 논문에서 마주했던 노장에게서 영화와의 인연과 영화를 통해 그가 만나게 된 세계에 대해 물었다. 사토 다다오와 알고 지낸 한국 감독 3인에게서 그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을 함께 청해들었다.

“요즘도 강단에 서십니다. 좋아하는 감독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빛내죠.” 일본 최고(最古)이자 최고(最高)에 속하는 영화광이며 영화평론가인 사토 다다오(佐藤忠男)는 1930년생이다. 영화감독을 키우는 실무 위주의 일본영화학교 교장으로 10년째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그의 건강에 대해 묻자, 통역을 맡은 일본영화학교 학생이 대뜸 대답한다. “지지하고 싶은 영화를 찾아서 글을 쓸 뿐 재미없는 영화에 대해서는 글을 쓰지 않는다”는 그를 지난 9월25일, 요코하마에서 만났다. 사토 다다오는 인터뷰 내내 형형하고 따뜻한 눈빛으로 영화와 맺게 된 인연과 영화가 만들어준 인연, 영화를 통해 만난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2000년까지 140권의 저서를 냈고 최근까지 저술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그는 60년 가까이 한결같은 열정으로 영화를 보고, 영화의 좋은 점을 발견하고, 그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시대와 취향을 막론한 워낙 방대한 저술 덕에 영화에 대해 글을 쓰는 많은 이들은 특정 일본영화나 감독에 대해 말할 때 그의 글을 인용하는 것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일본영화 평론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영향력과 연배를 고려할 때, 하스미 시게히코와 사토 다다오는 좋은 비교 대상이다. 도쿄대학교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 철학을 공부한 뒤 모교에서 총장까지 역임한 하스미 시게히코가 최고의 엘리트로 영화평론가보다는 이론가 혹은 학자에 가깝다면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수많은 영화의 텍스트와 컨텍스트를 알기 쉽게 설명해온 사토 다다오는 영화를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다. 그토록 많은 책을 썼지만 영화를 보는 방법에 대한 책을 쓰지 않았던 그는 가장 이상적인 인상비평가 중 한명이다. 영화평론가 허문영은 이에 대해 “사실 두 사람은 영화에 대한 접근방식부터 너무 달라서 비교가 불가능하다. 하스미 시게히코가 철저히 텍스트 내부를 미치광이처럼 파고드는 평론가라면, 사토 다다오는 영화사 연구가에 가깝다. 저서를 봐도 이론적 깊이는 별로 없는데 개별 감독 혹은 개별 영화의 생생한 육체성을 파악하는 부분은 심금을 울린다. 체험에서 우러나는 직관이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서 수학한 이들은 “학생들의 실습작품을 대할 때, 다른 분들은 혹독한 비평을 서슴지 않지만 사토 선생님은 언제나 좋은 점을 찾아주시고 그 장점을 살려야 한다고 독려한다”고 전한다. 그에게 영화는 결국, 비판과 분석이 아닌 칭찬과 사유의 대상이다. 영화광에서 영화의 친구, 그리고 영화의 선생으로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이야기를 청해 듣기에 두 시간은 그저 아쉬울 뿐이었다.

패전 뒤 문화적 충격 경험하고 영화평론가로

군입대 직후 고국의 패전을 맞닥뜨린 15살 소년 사토 다다오는 철도원 양성학교를 거쳐 철도회사에 들어갔지만, 경제 불안정으로 인한 정부 기업의 대량 정리해고로 곧바로 회사를 나와야 했다. 이후 그는 전화기 수리 공장을 다니면서 영화에 대한 글을 잡지에 기고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쌓인 글을 묶어 출간한 책 <일본영화>가 <키네마준보>에서 평론상을 수상하면서 20대의 사토 다다오는 전문 영화평론가로 나선다. 창간잡지 <영화평론>의 편집장이 된 것도 그 무렵의 일이다.

-가장 처음 보았던 영화를 기억하시나요. =전쟁이 끝나고 일본을 이긴 미국이란 나라를 알기 위해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녔습니다. 예술과는 거리가 먼 오락영화들이었는데 처음 본 영화가 <카렌의 식모>였습니다. 워낙 오래전이라 정확한 제목인지는 모르겠지만 첫 장면에 주인공 시골 소녀가 뉴욕에 도착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젊은 남자들이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을 기분 좋은 표정으로 뒤돌아보더군요. 그 모습이 나에게는 크나큰 문화적 충격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에는 남녀가 유별하다는 교육이 워낙 투철했기 때문에 예쁜 여자가 지나갈 때 쳐다볼 경우에 불량소년이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패전 원인이 미국의 산업이나 무기가 일본을 앞섰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식의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했고,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가 진짜로 졌음을 실감했습니다.

-다른 영화는 기억에 남는 것이 없나요. =당시 영화는 미국 문화정책의 일환이었죠. 영화의 수입관리도 미군이 맡고 있었어요. 그러다보니 빈민이나 흑인문제 등을 다룬 영화는 수입될 수 없었고, 잔혹하고 암울하며 종말론적인 내용이 빈번하게 등장하는 지금의 미국영화와는 여러모로 달랐죠. 가난한 사람도 차를 몰고 어느 집에나 냉장고가 있는, 부유하고 희망이 가득한 미국영화를 보면서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일본이 미국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고 여길 정도였어요. 반면 내 주위의 현실을 표현한 것은 일본영화였습니다. 문득 그 두 가지 극단적인 영화 사이의 세계가 궁금해지더군요. 수많은 미국영화 중에 멕시코영화 한편이 섞여 들어왔는데 에밀리오 페르난데스 감독의 <진주>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그 영화 속 멕시코인들은 일본처럼 가난했지만 자세가 곧고 당당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미국이나 일본영화가 아닌 영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습니다.

-처음부터 영화평론가가 꿈이었나요. =원래는 영화사에 들어가서 조감독이 되고 싶었지만, 당시 그런 직업은 좋은 대학을 졸업해야 가능한 일이었거든요. 오시마 나기사나 이마무라 쇼헤이처럼 일류대를 나온 것도 아니고 해서 그냥 포기했죠. 시나리오작가가 되겠다고 준비하면서 잡지에 영화평을 조금씩 기고했던 겁니다.

<일본의 밤과 안개>

<일본의 밤과 안개>

-처음으로 편집장을 맡았던 <영화평론>은 어떤 종류의 영화잡지였나요. =영화이론이나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전문잡지였어요.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는 왜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만 나오는지, 오즈 야스지로 영화의 카메라 앵글과 무빙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등에 대한 글이 실렸죠. 5년 동안 <영화평론>에 있다가 1961년경 <사상의 과학>이라는 잡지를 만들었어요. 영화비평 잡지가 아닌 일본의 사상이나 사고방식 등을 다룬 잡지였습니다. 흔히 생각하는 철학처럼 어렵고 추상적인 내용보다는 일반 대중의 사상을 구체적으로 분석했어요.

-선생님께서 영화평론을 시작할 당시 일본의 영화평론계는 어떠했나요. =좌익의 입장에서 영화의 정치적 측면에 집중하는 것과 영화의 테크닉을 분석하는 것, 그렇게 두 가지 경향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중간에 있었습니다. 테크닉이야말로 사상을 발현하는 매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영화 속에 반영된 사회적 분위기에 충격을 받았듯, 영화 속의 사회적 부분을 발견해서 글을 쓰곤 했어요.

‘반항아’ 감독들의 지원자

이마무라 쇼헤이, 오시마 나기사, 마스무라 야스조, 하니 스스무…. 오즈 야스지로와 구로사와 아키라와 미조구치 겐지로 대변되는 거장을 넘어 일본영화의 누벨바그를 이끈 주인공들이다. 고전의 가치를 되새김질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를 향한 관심의 촉수를 가다듬었던 사토 다다오는 당시의 ‘반항아’ 감독들을 후방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자임했다. 누벨바그의 친구에게서 그들의 젊은 시절을 엿들었다.

-일본 누벨바그 감독들이 새로운 세대임을 알게 된 것은 비단 영화 때문만은 아니었을 텐데요. =그때까지 일본영화는 굉장히 봉건적이었기 때문에 선배 감독에게 젊은 감독이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었어요. 영화평론지에 실을 논문으로 신인감독의 포부를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에게 부탁했는데 그가 구로사와 아키라, 오즈 야스지로, 미조구치 겐지, 나루세 미키오 등 대선배의 작품을 한방 먹이는 논문을 써서 보낸 겁니다. 일본 영화계에 드디어 젊은 세대가 등장했다는 생각에 무척 기뻤지요. 그런데 오시마 나기사는 마스무라보다 더 과격한 사람이어서 선배뿐 아니라 동료들까지 한방 먹이는 발언을 서슴지 않더군요. (웃음) 반면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은 그런 종류의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감독들끼리는 사이가 좋았나요. =오시마 나기사가 대장이었죠. (웃음) 그는 조감독 시절 쇼치쿠 오후나 스튜디오에서 일했는데 당시 그곳은 주로 따뜻한 홈드라마와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곳으로 유명했습니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오시마는 그와는 상반되는 과격한 영화를 만들면서 여러 유형의 인간들을 비판하는 작품으로 평판이 높았어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들의 일화도 많이 알고 계실 텐데요. =오시마 나기사의 처음 두편의 영화가 큰 인기를 끈 뒤 만든 세 번째 영화가 일본 학생운동 과격파를 지지하는 내용을 담은 <일본의 밤과 안개>였어요. 그런데 관객이 전혀 들지 않자 쇼치쿠가 개봉 이틀 만에 영화를 극장에서 내려버렸어요. 1960년 당시 학생운동은 매우 민감한 소재였기 때문에 쇼치쿠의 그런 결정에 정부의 압력이 있었다고 생각한 오시마는 영화사에 강력하게 항의했습니다. 진상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었죠. <일본의 밤과 안개>는 학생운동 과격파와 온건파에 속한 두 남녀의 결혼식장에서 젊은이들이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필이면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진 직후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결혼식이 실제로 열렸죠. 그런데 피로연 때 손님들이 신랑 신부에게 한마디씩 해주는 자리가 쇼치쿠를 격렬하게 성토하는 자리로 변해버린 겁니다. 파티장에는 쇼치쿠 중역들도 와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군요. 마지막에는 신랑 자신이 회사 비판 발언을 마무리했구요. 나는 이 사태를 중지시켜야 할지, 그냥 두어야 할지 고민하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어요. (웃음) 오시마 감독의 결혼식 자체가 자신이 만든 영화 속 장면과 흡사해졌고, 회사는 오시마를 비롯한 일군의 젊은 영화인들을 모두 해고해버렸어요. 당시에는 메이저 스튜디오의 눈 밖에 나서는 영화를 만들 기회를 갖기가 무척 어려웠어요. 오시마는 결국 TV 드라마 연출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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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 권유선, 이윤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