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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원하는 것(What God Wants)
2001-09-19

신현준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1990년의 걸프전 이후 상식이 되었지만 전세계에서 일어나는 전쟁, 테러, 지진 등의 대재앙들은 ‘텔리바이즈’되고 있다. 사전적으로 따지면 ‘원거리에서 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처참한 장면들이 월드컵 축구 결승전이나 프로권투 세계 타이틀 매치처럼 ‘스펙터클’로 다가온다. 그래서 “무고하게 죽은 사람들 너무 불쌍하다”라는 인지상정이 들기 전 “비행기가 들이박았다고 해도 어떻게 거대한 빌딩 전체가 1시간 정도 만에 폭삭 무너져내릴 수 있을까?”라는 과학적 의문이 먼저 떠오른다. TV는 이런 의문을 전문가의 해설로 해결해준다. “누가 그랬을까,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도 “어떻게 저렇게 치밀하게 작전을 짰을까”라는 질문에 밀려버린다. TV는 나의 신이고, 신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이런 현상은 글 쓰는 사람의 인성이 단정치 못한 탓도 있겠지만, TV가 그렇게 ‘만든’ 면도 적지 않다. 내가 엄청난 사건을 경험하고 참여하는 자격은 ‘시청자로서’ 이외에는 없다. 사건의 원인과 책임을 따지는 일은 시청자의 몫이 아니다. 혹시 한국인의 유구한 전통인 ‘구경의 문화’가 작용해서 정도가 더 심한지도 모른다(참고서적: <일상으로 본 조선시대 이야기1>). 어쨌든 TV 시청이란 ‘강건너 불구경’ 이상이 아니고, 원거리에 있으니 발을 동동 구를 일도 없다. 게다가 구경은 혼자 할 때보다 여럿이 할 때가 더 재미있는 법. 그래봤자 <다이 하드> <에어포스 원> <비상계엄> 같은 영화를 들먹이면서 “영화랑 똑같네”, “아냐, 영화보다 더해”, “브루스 윌리스는 뭐하고 있어”, “해리슨 포드가 대통령 하지”라면서 ‘수다’를 떠는 게 고작이지만(이런 걸 신문기사랍시고 쓴 것도 여럿 보았다).

“미국도 한번 당해봐야 정신차린다”, “테러영화로 떼돈 벌더니 자업자득이다”라는 반응도 있지만 평생을 반미운동에 바칠 사람이 아닌 이상 ‘객기’에 지나지 않는다.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 “역사는 바보들을 위한 것이고, 게르만인은 유대인을 죽이고, 유대인은 아랍인을 죽이고, 아랍인은 인질들을 죽이고, 그리고 바로 이런 것들이 오늘날의 뉴스다”라는 노래가사를 인용하는 것도 괜히 심오한 척하는 것일 뿐이다. ‘문명의 충돌’ 어쩌고 하면서 철지난 담론을 들먹이는 일은 ‘이보다 더 한가할 수 없는’ 사람들이나 할 짓이다. “무구한 사람들이 자신의 나라를 위해 혹은 자신의 나라 때문에 죽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정부통치(government)를 중단하라”는 어떤 아나키스트 그룹의 성명서도 지금으로서는 양비론으로만 들린다.

언젠가 했던 말이지만 ‘세상에는 끔찍한 사건들이 일어나도 나는 심심하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다. 사촌 이내의 친지와 절친한 친구의 안전만 확인되면, 사해동포주의란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이고 값싼 동정심만 잠시 요동칠 뿐이다. TV를 켜놓은 동안만. ‘전쟁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반응도 일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지 세계평화에 대한 갈망과는 거리가 멀다. ‘이번 사건으로 세계경제와 국제정치가 혼란에 처할 것’이라는 우려도 마찬가지다. ‘과연 어떻게 될까’라는 질문은 ‘나는 어떻게 될까’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대답은? ‘God Knows!’다.

미국 대통령은 TV에 등장하여 신과 성경을 들먹이면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응징하겠다”고 말했다. 슈퍼테러를 감행한 세력도 ‘알라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런 게 ‘신이 원하는 것’? 어쨌든 이 글이 나올 때쯤이면 한쪽의 신의 뜻을 따라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미국의 적들을 ‘응징’한 다음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의 신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줄 것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테러리스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라는 점이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떤 신도 아무 말이 없다. TV에 의해 테러 용의자로 ‘만들어진’ 오사마 빈 라덴의 모습이 잠시 나왔지만, 우리는 ‘말’보다는 ‘외모’에 신경이 쓰이도록 길들여져 있다.

결국 나는 TV라는 신 앞에서 한없이 무력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신의 사제들에 대한 나의 바람도 소박하고 째째한 것이다. 다름 아니라 웬만한 동네에서는 유선 TV로 <CNN>을 볼 수 있으니 어설픈 동시통역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영어 못하는 국민들을 위한 배려라고 생각하겠지만 영어도 한국어도 둘 다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신의 계시를 저렇게 망쳐놓으면 되겠는가.

이 글의 제목은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 출신의 로저 워터스(Roger Waters)가 1992년에 발표한 솔로 앨범 <Amused to Death>에 수록된 곡의 제목 <What God Wants>를 번역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가사도 여기 실린 <Perfect Sense>라는 곡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신현준/ 방송 에세이스트 http://homey.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