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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시청 테러사건
2001-09-20

애니메이션/ <패트레이버2> 극장판

요즘은 워낙 황당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다보니 웬만한 사건은 ‘특보’나 ‘속보’로 취급되지 않는다. 설사 ‘속보’나 ‘특보’라 하더라도, 한국에서 벌어진 사건조차 ‘삼풍백화점 붕괴’나 ‘성수대교 붕괴’와 같은 큰 규모가 아니면 직접적으로 와닿는 심리적 충격의 정도는 그리 크지 않게 마련이다. <CNN>과 뉴스전문채널이 생겨나면서 전쟁조차도 생중계가 되다보니 해외 긴급뉴스도 여간해선 단순한 사건뉴스 정도로밖에 비치지 않을 정도로 자극불감증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9월11일 저녁에 본 ‘미국 동시다발 테러소식’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세계에서 4번째로 높은 빌딩이자 최대의 건물 면적을 자랑하는 ‘세계무역센터’와 미국 국방의 중추인 ‘펜타곤’ 등을 납치된 민간여객기가 들이받는 장면은, <다이 하드>나 <아마겟돈> 같은 할리우드 불록버스터의 특수효과를 방불케 했다. 문제는 이 사건이 1만명 이상의 사상자가 난 ‘현실’이라는 점이다. 세계경제의 중추라 할 수 있는 110층 짜리 쌍둥이빌딩 ‘세계무역센터’를 비행기가 들이받아 건물이 붕괴되는 신은, 아무리 브라운관을 통해 본 것이라 해도 ‘가상’과 ‘현실’의 격차를 확실히 느끼기에 충분했다.

‘테러’를 소재로 한 영화는 수없이 만들어지지만(물론 거의 대부분이 승리하는 미국편 주인공을 등장시키는 할리우드영화), 애니메이션은 그리 많지가 않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나 침략 외계인의 거대 로봇이 도시를 파괴하는 것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긴 하나 거의 국지전에 가까운 ‘전쟁’ 성격이 강한 편이고, ‘테러’는 상반된 이념을 가진 동등하지 못한 세력간에 생기는 것이다 보니 전체적인 이야기의 방향이 무거운 주제로 흐르기 쉽기 때문에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다루기 어려운 소재인 까닭이다. 수많은 분쟁지역을 넘나들며 사건을 해결하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마스터 키튼>이나, 테러집단에게 가족들이 살해당한 여자주인공이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대(對)테러진압부대 대장이 되어 활약하는 신타니 가오루(<에어리어 88>의 원작자로 국내에서도 많은 팬을 가지고 있다)의 <사막의 장미> 같은 작품들은 원작의 탄탄함 덕분에 애니메이션으로도 ‘테러’라는 소재를 비교적 무리없이 표현한 작품 사례로 들 수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을 접하면서 제일 먼저 떠오른 작품은, 바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패트레이버2> 극장판이다. <패트레이버> 시리즈는 만화가인 유우키 마사미와 오시이 감독이 다카다 아케미(캐릭터 디자이너), 이토 가즈노리(각본가), 이즈부치 유타카(메카닉 디자이너)와 함께 만든 창작집단 ‘헤드기어’가 만들어낸 근미래 메커닉물. 근미래 도쿄를 배경으로 로봇 범죄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로봇경찰부대 이야기로, 중장비를 조금 발전시킨 듯한 메커닉 설정이나 현대 직장생활에서도 볼 수 있을 법한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행동들이 자아내는 ‘현실감’ 때문에 폭넓은 팬층을 가지고 있는 작품이다.

<패트레이버2> 극장판은 47화의 TV시리즈, 23개의 OVA, 그리고 2편의 극장판으로 제작된 <패트레이버> 라인업 중에서도 가장 무거운 분위기를 자랑한다. 처음 봤을 때 폭탄에 맞아 두 동강나는 베이브리지나 공격용 헬기 ‘헬 하운드’에 의해 박살나는 일본 경시청, 방송사 등이 너무나 사실적인 그림체에서 풍기는 묘한 현실감에 사로잡혔던 작품이다. 이러한 테러의 주동자는 동남아시아의 밀림에 PKO 파병 자위대로 참여했다가 부대의 전멸을 겪고 살아남은 ‘츠게 유키히토’. 자기 주변만 안전하면 세상은 평화로운 것이고, TV를 통해서만 접하는 분쟁국가나 빈곤국가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부분적인 원조만으로 책임을 다했다고 안위하는 일본인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 유키히토가 벌이는 이 ‘테러’는, 그 발상의 황당함과 과격성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있다.

점점 타인과의 접촉이나 관계가 매체에 의존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아지는 세상입니다. 브라운관이나 신문에 나타나는 것이 100%의 진실이라고 믿기보다 그 사건에 대한 ‘현실’에 좀더 관심을 가지는 자세가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대한 가장 큰 테러행위는 바로 ‘현실에 대한 무관심’일 수도 있습니다.

김세준/ 만화·애니메이션 칼럼니스트 neoeva@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