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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사랑은... 머물지않고 흘러가는거야
2001-09-21

봄날은 간다 만난 지 얼마 안 돼 막 호감이 커질 때, 여자가 먼저 마음을 드러낸다. 급속하게 가까워지고 여자가 한없이 좋아져 가족에게 소개하고 싶다. 그때 여자가 주춤한다. 전과 달리 거리를 두려 하고, 급기야 한달 동안 보지 말자고 한다. 한달의 의미가 뭘까. 파악이 잘 안되고 보고 싶은 마음에 한달이 너무 길다. 일방적인 통고에 화도 난다. 무리를 해가며 여자를 찾아간다. 여자는 화를 낸다. 그러기를 몇 차례, 한달이 가기 전에 여자는 `헤어지자'고 말한다. 아무런 준비가 안 됐지만, 다른 여지가 봉쇄됐다. 자신도 헤어지자고 말하고 돌아온 뒤 일상에 두서가 안 잡히고 자기 방의 공기가 답답하다.

정말 내가 싫은 건가, 다투면서도 애정을 보일 때가 있었는데. 머리에 앞서 몸이, 마음이 여자를 부른다. 1할의 희망과, 9할의 망가지는 심정으로 여자를 찾아가서는 다른 남자와 만나는 걸 본다. 객기를 부리다 창피를 당한다. 혼자서 오열한다. 사랑이 지나갔음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의 기억과 평화롭게 지낼 수 있기까지의 긴 시간들. 그 시간도 지나가면서 젊은 날은, 봄날은 간다.

낯익은, 그러나 영화에는 없던 여자 <봄날은 간다>는 누구나 한번쯤 겪어봤을 사랑 이야기다. 조금 더 일찍 끝냈거나, 더 끌었을 수 있지만 시작과 결별, 그 뒤까지 남녀가 겪는 사연과 심리에 공통분모가 있다는 걸 이 영화는 또렷하게 증명한다. 누구나 다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떠올리게 하면서, 거기에 연민이 스미게 한다. 아울러 그때 힘들었던 이유를 상대방에게 전가하지 않고, 옹졸했던 그때의 마음까지도 풀어주는 이런 영화는 쉽게 만나기 힘들다. <봄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남자 상우(유지태)의 시점에 서서 여자 은수(이영애)가 왜 주춤했고, 휴지기를 두려 했고, 다른 남자를 찾았는지 친절히 설명해 주지 않는다. 한번 이혼한 전력에서 약속을 주저하고 두려움이 많을 거라는 유추가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은수의 행동 하나하나는 낯익다. 모호하고 이율배반적으로 비치는 태도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지닌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랬을까, 사랑에 빠졌던 그때 가졌던 궁금함이 더러는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 더러는 그대로 남으면서 아이러니가 친숙하게 다가온다. 누굴 좋아할 때 다가오는 정체모를 불안함, 좁히려 할 수록 멀어지곤 하는 둘 사이의 거리 등 견디기 힘들 게 만들었던 그 아이러니들이, 오열하는 상우를 보며 눈가가 따가와지는 순간에도 마음 속에 편안하게 들어와 안긴다. 다른 멜로 드라마 같으면 은수를 나쁜 여자로 만들고 말았겠지만, 이 영화는 달랐다. 감정에 솔직한 채 배회하는 모습이 안쓰럽고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이렇게 여자를 묘사한 건 우리 멜로 영화에서 처음 만나는 순간이다.

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 수정> <봄날은 간다>는 설렘, 행복, 아픔 등 사랑할 때 주인공이 느끼는 심리의 기복을 관객들이 그대로 따라주기를 의도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멜로영화지만, 멜로라는 어감이 이 영화를 설명하기에는 비좁아 보인다. 상우을 쫓아 관객의 마음은 아파지고, 그것 만으로도 영화는 성공하고 있지만 사람이나 관계를 비추는 각도가 다른 멜로영화처럼 단순하지가 않다. 은수의 묘사에서 단적으로 보여지듯, 구체적인 디테일들이 현실의 아이러니와 모호함까지 담아낸다. 언뜻 남녀관계를 양파껍질 처럼 한겹씩 벗겨내는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이 떠오르지만, 이따금씩 관객의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속살을 들춰내는 모습이 없다. 같이 순하면서도 역설을 담아내는 이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다음 행보를 무척 궁금하게 만든다.

임범 기자 isman@hani.co.kr